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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원문]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 비교분석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4:30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 비교분석 / 2014년 8월 26일 기사

 

1.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그동안 예수를 직간접적으로 만났던 이들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물음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진지한 숙고와 탐구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답변, 또는 개인적 신앙고백에 따라 모든 신앙과 삶의 근간이 결정된다. 결국 기독교의 신앙 혹은 신학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에 따라 가치관과 세계관의 방향성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명확한 답변은 신약성경,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사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속성이나 성품을 다양한 칭호로 설명해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칭호들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예수의 본질,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예수의 성품, ‘예수는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예수의 사역이나 상태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칭호들의 배경과 의미를 밝히는 것은 예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믿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 개인적 신앙고백에 따라 예수를 믿고 따르지만 일부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자신이 이해하거나 경험한 예수를 마치 성경이 말하는 예수로 믿으려는 신앙적 오류를 자주 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곧은 신앙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결국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가장 성경적인 ‘예수상’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며, 올곧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사복음서, 즉 공관복음서(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의 중요한 몇 가지 칭호들을 살펴봄으로써 예수가 과연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오시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2. 공관복음서의 특징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에 의해 기록된 4개의 복음서로 구성돼 있다. 이 네 권의 복음서는 각각 저자의 의도에 따라 개별적인 방식으로 예수의 생애와 말씀, 그의 사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며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복음서를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것이 엄격한 전기가 아니라는 점도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이는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극히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 주된 목적이 오직 사실들만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형태는 역사적이지만 그 목적은 역사 이상이다. 또한 복음서가 기록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지연, 구두전승의 한계, 성도의 박해, 기독교의 급속한 확장으로 말미암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권위 있는 답변의 급박한 필요성, 교리 교육 등 매우 다양하다.

특히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일반적으로 기록 방식이나 관점, 내용 등이 매우 유사하며, 공통된 자료를 근거로 했거나 혹은 먼저 기록된 복음서를 나중에 다른 복음서의 저자가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공관복음서의 경우 주로 침례와 시험을 받으신 예수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며, 세부적인 설명에서는 약간씩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 공관복음서 모두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공적 사역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또한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을 예수의 사역에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 재판, 십자가 사건 및 부활에 대해 모두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공관복음에서는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자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자료 선택, 배열, 특히 용어에 있어서 큰 일치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아주 다른 윤곽과 비교해 예수의 삶에 대해서 동일한 윤곽으로 그리고 있다. 예를 든다면 예수는 길릴리와 그 접경 지역에서 가르치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와 반대로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반복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스텐턴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경우 예수가 갈릴리에서 선교를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예수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갈릴리보다는 그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 잘 나타나는 단어들이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즉,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는 ‘왕국’이라는 단어가 단 두 단락에만 나온다(요 3:3;5, 요 18:36;38). ‘능력’이란 말이 마가복음에는 10회, 마태복음에는 18회, 누가복음에는 15회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세리’는 공관복음서 전체에 21회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은 대체로 공관복음서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생명’, ‘빛’, ‘세상’, ‘사랑’ 등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타나지만 공관복음에는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 메르켈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공통성은 단지 이들이 문헌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문을 역시 같은 순서에 놓고, 반면에 나머지 본문들의 순서에는 다르기 때문에 그 두 복음서들은 마가복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며,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가 대본으로 삼은 가장 오래된 복음서라고 주장했다.
 
3. 복음서의 기록목적

공관복음서는 이와 같이 서로 연관돼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각 복음서의 기록목적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됐다는 것도 특징이다.
 
1) 마가복음

마가의 공동체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유대교 지도자들도 기독교에 대한 적대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또한 이방 권세들로부터의 박해에도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가는 고난에 맞서 굳게 서기로 결심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하려고 했다.

마가는 그의 공동체 상황의 실체들을 예수께서 곧 돌아오시며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자신들의 믿음과 관련시켰다. 무엇보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신앙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봉사의 삶을 살며, 필요하다면 고난과 순교의 삶을 살기 위해 겸손히 스스로를 준비한 자가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서가 처음 쓰여진 복음서임을 인정하고,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복구하려는 노력에서 가장 우선적인 자리를 주었다고 말한다. 특히 마가복음의 기록목적에 대해 예수의 이야기를 극적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용기 없고 경직된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게 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는 70년경의 예루살렘의 함락과 멸망 직전에 기록됐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 마태복음

마태는 적대적이고 투쟁적인 유대교에 대항해 하나의 변증으로써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가 예수는 ‘메시아’이시며, 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마태의 복음서는 자신의 공동체가 비기독교적 유대주의와 논쟁할 때 도움이 되도록 의도됐다.

특히 마태도 마가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역사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전할 말을 기록했다. 마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강한 도덕적 규범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의 말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처럼’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고 그의 공동체에게 요청한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마태의 기독교 공동체는 명확히 드러난다. 마태복음서에만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됐다(마 16:18, 마 18:17). 누가복음서는 15:3~7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서 18:12~14에서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길 잃고 헤매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돌보라고 권유한다.
 
3) 누가복음

누가는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복음서 첫 머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1~4).

즉, 마가와 마태보다 더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쓰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는 구주가 되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를 썼으며,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실현한 구원이 부활 후 확장되는 물결 가운데 교회에 의해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하는 역사도 기록했다. 물론 마태처럼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역할을 하도록 구성했다. 무엇보다 누가의 공동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을 비롯해, 가난한 자들, 여자, 소외된 자들, 죄인들 등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전 우주적임을 말하고자 했다.
 
4) 요한복음

요한복음의 경우 공관복음서가 모두 기록된 후에 기록됐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일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요한이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를 중심한 소아시아 교회들이었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이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 그들이 전통적으로 속해 있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단호한 추방 조치를 당했고,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로 간주됐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은 것과 동일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셨으나 태초부터 범죄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의 법에 따라 대속 희생을 치르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분으로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구주, 곧 그리스도 되심을 변증하기 위해 일종의 신학적 변증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기독교가 구약을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리하여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신흥 종교의 하나로 몰아붙이는 유대주의자들과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방인들에게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입증하고 이들로부터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록한 변증서로 볼 수 있다.
 
4. 복음서와 예수

사복음서의 기록목적이 저자의 의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복음’에 있어서는 공통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즉, 저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복음서의 주님께 대한 일반적인 칭호는 ‘예수’다. 이 간단한 이름이 거의 600번이나 나타난다. 사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겨우 네 번(막 1:1, 마 1:1, 요 1:17; 17:3) 나오며, ‘주 예수’라는 표현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의 참된 인간성을 증명한 것이다.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신약성경 시대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던 이름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예수’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의 인간성을 확인함이었다. 예수를 아는 사람, 예수와 함께 생활한 사람, 예수와 함께 이야기 한 사람, 예수와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한 이들은 예수를 땅에 속하지 않는 신과 같은 분이 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흔히 있는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이름이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로서 ‘돕는 주님’이라는 뜻이지만 헬라어로는 ‘고친다’는 뜻을 지닌 ‘이스타이’라는 동사와 예수의 이름을 결부시켰다. 주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이름에는 그가 세상에 오셨다는 뜻과 또 그 만이 가능하다는 뜻이 있다. 예수는 죄의 결과와 그 속박에서 해방할 수 있는 거룩한 구세주로 오신 것이다. 오직 그 만이 사람의 혼과 몸에 고침을 줄 수 있는 거룩한 의사이시다.

그렇다면 각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했을까. 거스리에 따르면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약의 예언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었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아적 관심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고자 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에서 눈에 띄는 유대-기독교적 색채의 흔적이 없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사실적 설명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방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누가복음에 있는 독특한 비유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요한복음은 구약성서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예수를 빛, 생명, 사랑, 진리 등의 추상적 주제들과 결합시킴으로써 예수의 전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복음서 중 누가복음은 현대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를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누가의 예수상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극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보다 훨씬 더 예수께서 여자와 세리와 죄인과 사회에서 소외받은 자들에 대해 관심을 보였음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인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은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된다.

김경진 또한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으로써 예수는 섬기는 자로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으로써의 누가복음은 주님의 취임 설교에서부터 나타난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그것을 위한 준비로써 회개를 강조하는 마가복음(1:15)과 마태복음(4:17)에 나타난 취임설교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시종일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견지하며, 바로 그것을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한 특징으로 제시하며, ‘전인구원적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확하며, 복음서 기자의 극적인 이야기 전개는 감동적이다. 요한복음서의 전반부는 몇몇 개인과 예수의 대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예수와 대화하는 몇몇 사람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격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만큼 요한복음서에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감동적이며 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요한복음서는 철저히 유대적이며 동시에 완전이 반유대적이다. 예수의 반대자들은 ‘유대인들’로 불린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때로 논쟁적이며 궤변적이다.
 
5.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공관복음서에는 다양한 칭호들로 예수를 설명한다. 마가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1:11, 3:11, 5:7, 9:7, 14:61~62, 15:39), ‘인자’(=사람의 아들, 2:10;28, 8:31;38, 9:9;12;31, 10:33;45, 14:21;41;62), ‘다윗의 자손’(10:47~48, 12:35~37), ‘그리스도’(=메시아, 8:29, 9:41), ‘주’(7:28, 11:3, 12:37), ‘하나님의 거룩한 자’(1:24), ‘아들’(13:32) 등으로 불린다. 마태복음은 ‘주’(7:21~22, 8:2;6;8,21~25, 9:28 등), ‘다윗의 자손’(9:27, 12:23, 15:22, 20:30~31, 21:9), ‘인자’(8:20, 9:6, 10:23, 11:19, 12:8;32;40), ‘하나님의 아들’(2:15, 3:17, 4:3;6, 8:29, 14:33, 16:16, 17:5 등), ‘아들’(11:27, 24:36, 28:19), ‘그리스도’(1:16~17, 2:4, 11:2, 16:16;20, 23:10, 26:13), ‘유대인의 왕’(2:2, 27:11;29;39) 등으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1:35, 3:22, 9:35, 4:3;9;41, 8:29, 10:22), ‘인자’(7:34, 9:58, 18:8, 19:10, 21:36, 22:69) 등의 칭호로 예수를 나타내고 있다.
 
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는 말씀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도입부에서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특히 예수가 침례를 받을 때(“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1:11), 변화하였을 때(“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등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의회 앞에서 예수는 그가 메시아, 즉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임을 묻는 대제사장의 물음(“…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막 14:61~62)에 긍정한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또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고 고백했다.

니클 또한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예수가 하나님과 고유한 관계를 나타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분은 논의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가의 목적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대면한 자들이 얼마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만 하는가를 논증하는 것이었다(막 1:1).

마태복음도 마가복음과 동일한 입장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한다. 마태복음에서의 예수는 이미 그가 출생한 이래 하나님의 아들이다(마 2:15).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편집적인 부가어(“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33)와 베드로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이 보여주듯이 제자직에 속하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수식 없는 표현은 마가복음에서는 단 한번만 나타난다(막 13:32). 마태는 이 진술을 넘겨받았다(마 24:36), 그 외에 마태는 Q에서 계시의 말씀인 두 번째 구절을 넘겨받았다(“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 마지막으로 침례 명령(마 28:19)에서 역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 옆에 나란히 불리운다.

오그래디는 마태는 1장에서 4장에서 인간 예수를 다루면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분명히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잉태되었으므로 그의 기원은 하나님이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마 2:6).

물론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는 고대 왕들이나 천사들 혹은 의인들을 정의하던 방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그 대신 예수는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늘과 땅을 통치할 분이다(마 28:18). 이는 하나님과 완벽하게 동행하는 삶으로써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얻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예수의 잉태, 탄생, 유년기, 침례, 유혹, 복음 선포, 죽음, 부활, 승천에서 골고루 나타난다. 결국 이 호칭은 마태가 메시아인 인간 예수 안에 담긴 신비와 마태 공동체의 승천하신 분에 대한 고백을 표현한 것이다.

킹스배리의 입장도 동일하다. 마태는 이 칭호를 예수의 ‘삶’의 여러 국면을 따라 기독론적 칭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메시아가 되신 예수의 인격적 신비의 가장 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마태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높임의 의미로 사용했던 칭호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백적 칭호이지 결코 불신자들도 사용할 수 있는 대중적 칭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결국 공관복음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나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예수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 사랑의 체현이고,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실행자,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 하나님이 하신 구원약속의 성취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신 이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자, 구원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2) 인자(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칭호는 사복음서에 총 82번 나온다. 공관복음서에는 62번, 요한복음서에는 13번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병행절을 제거한다면 공관복음서에는 38개의 ‘인자’라는 칭호가 등장한다. 또한 공관복음서에는 마가, 마태, 누가복음에 모두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

예수는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아적인 칭호들을 굳이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간접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용하며, 신앙고백을 통해 그것이 등장할 경우에 받아들였지만 당시의 메시아적인 칭호를 가급적 피하면서 대신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 스스로 즐겨 사용한 명칭이다. 예수는 이 명칭을 사용하심으로 그와 인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의 기원은 하늘에 있었고, 그러면서도 땅 위에서 인자로서 사역을 수행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말씀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고, 어떤 때는 메시아적 임무로써 이 뜻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마 16:27, 막 8:38). 대부분 복음서의 교리는 인자라는 명칭과 관계되어 있고 그 연관의 내용은 그의 오신 목적과 관계된다. 곧 구속적 사업이다.

예수의 사명은 자기 자신을 희생의 대속물로 주는 것에 있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과 구속을 이룩하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자에게는 예수가 영광에 이르기 전에 땅 위에서 고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있는 십자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사명이었다. 예수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이겨 부활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올 것을 인자의 이름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로서의 예수의 사역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첫째는 예수의 공적 사역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관련된 것이고, 셋째는 예수의 재림과 관련된 것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이 세 가지의 구별된 국면을 따라 예수의 사역을 동일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인자’라는 칭호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 니클은 ‘인자’라는 칭호는 유대교적 유산으로 인하여 이미 세상 끝에 권세와 영광으로 올 인간 이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가는 그러한 의미에 친숙했다는 것이다(막 8:38, 13:26, 14:62). 마가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할 때, 영광과 권위의 개념들은 고난의 필연성과 결합된다. 인자는 버림 받고, 넘겨져서 고난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 이 양자의 차원이 공존하지 않고는 어떤 기독론도 완전치 않음이 이해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인자’라는 칭호는 전적으로 예수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이 칭호는 대중, 또는 세상,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들 중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 곧 백성의 지도자들과 만나실 때 자주 사용하신 칭호로써 그 성격상 ‘대중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이 칭호를 사용해서 자신을 사람, 또는 인간으로 나타냈고, 그의 대적자들을 향하여 신적 권위를 나타냈던 것이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전도활동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알릴 것이냐에 집중하셨다. 일반이 잘 알고 있어 인정받을 만하고 친밀감도 있는 칭호인 ‘인자’를 새롭고 기묘하며 놀랄만한 방법으로 사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귀를 기울이게 했다.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셨다.

특히 이 칭호를 장차 받으실 영광, 재림, 심판과 관련해 말씀하셨을 때도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눅 22:69),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러므로 너희는 장치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예수는 ‘인자’라는 칭호를 통해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와 함께 밀착되어 사용됐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밀착해서 나타나는 곳은 재림의 장면과 심판을 위해 인자 예수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부활 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를 주관하시며 보호하신다. 마지막 때 인자 예수가 하늘 영광 가운데 왕으로 나타나 구원 또는 영벌에 대한 심판을 행하실 때 예수에 대한 모든 비밀은 사람 앞에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기록론적 입장에서 이러한 장면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와 인자라는 칭호가 서로 합쳐지는 장면이다. 즉, ‘인자’나 ‘하나님의 아들’은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들로 볼 수 있다. 인자라는 칭호가 대중적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고백적인 성격을 지닌 만큼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는 고난의 종이라는 것과 십자가는 오직 ‘인자’가 가야 할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고난의 종으로서의 인자는 인간을 위하여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 후의 ‘인자’는 모든 인류의 왕이 되신다.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시며 마지막 때 의인에게는 영생을, 악인에게는 영벌을 주시는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들 앞에 심판자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인자’는 죄인된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치욕’과 하나님의 구속사적 은혜와 사랑을 보여준 예수의 ‘영광’을 함께 나타내는 칭호로 해석할 수 있다.
 
3) 그리스도(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신약성경에 531번 나온다. 복음서에는 54번 나오고, 대부분은 사도행전 이후 바울서신에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오’(눅 4:18, 10:38)라는 동사에서부터 왔는데, ‘기름붓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의 직역이기 때문에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에서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들과 왕들이었는데, 예언자들도 기름 부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레 4:3, 6:22, 삼상 24:10, 삼하 23:1, 왕상 19:16). 이렇게 기름 붇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적 직무를 서임하셨음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종’이라는 특별한 무리에 속하게 되어 그들의 인격이 신성시되고 침해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종말에 선지자를 기다렸지만 대제사장도 기다렸고, 동시에 왕도 기다렸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약시대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에서도 왕, 제사장, 선지자를 메시아로 기다렸다. 그러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나단 예언에 근거해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 왕국을 재건할 정치적 왕을 나타내는 ‘민간 메시아 사상’이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신앙고백의 배경이었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종말에 하나님의 왕국, 곧 구원을 이루시는 왕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예수의 칭호 중에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된다. 구약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에서 기본 칭호이고, 또한 이 칭호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칭호로써 구약과 신약의 계속성을 잘 밝혀주는, 곧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믿음의 형식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마태복음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마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바로 “오시는 그 분”이시며(마 11:2~6),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시는 왕으로 오신 분이시다(마 1:16, 16:20, 24:5). 또한 이스라엘(아브라함)의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분이시며(마 1:1,17),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구원 또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다(마 1:21, 3:11).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더 나아가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로도 규정지으려 한다. 메르켈도 킹스배리와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마태는 이 칭호를 ‘하나님의 아들’을 써서 보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말씀한 것으로 묘사된 세 개의 전승(막 9:41, 12:35, 13:21)을 포함했지만 그것들 중 어느 곳에서도 예수는 명확하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자’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가 유대교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임을 믿기는 했지만 그의 공동체의 어떤 이들에 의해 오해되고 있었던 까닭에 메시아 칭호인 ‘그리스도’를 조심스럽게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바울 서신들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예수의 성(姓)처럼 사용하는 반면, 마가는 그것을 직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막 8:29, 14:61, 15:32).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칭호로 표현한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써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가 인류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 제사장, 선지자로 이 세상을 승리로 이끌 구세주가 되며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주인임을 나타낸 것이다.
 
4) 주

‘주’라는 칭호는 널리 쓰이고 또한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칭호다. 예수를 주라고 신학적인 말로 부른 것은 마가복음에는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막 11:3, 12:37). 마태복음에서도 그 정도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17회가 나타난다. 특히 바울서신에는 130회나 나온다. 그리고 신약 전체에는 719회가 나오는데, ‘주’를 다른 말과 결합하여 쓴 것은 ‘나의 주’가 1회,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28회, ‘주 예수 그리스도’가 18회,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가 3회,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 혹은 ‘우리 주 그리스도’가 1회, ‘우리들의 주 예수’가 9회, ‘주 예수’가 12회, ‘주 그리스도’가 1회이다. ‘주’라는 말은 기독교의 믿음의 골수요 중심이 되는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어로 큐리오스(Kurios)에 해당하는 ‘주’라는 말은 존엄과 사랑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주’는 직무를 수행하는 예수의 능력과 결합한다. 예수는 우리의 ‘주’이시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 2:20). 그는 주님이신 동시에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주’라는 칭호는 궁극적 승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주 예수의 출현이기 때문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딤전 6:14). 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마지막 시대에 영광과 승리 속에 나타나실 분이라고 믿으면서 그를 권위 있는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는 신앙을 갖고 예수를 언급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신앙고백의 형태를 띤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자주 ‘선생’혹은 ‘랍비’를 호칭으로 사용했다. 마태는 그것을 철저하게 변경했다. 유다만이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다(마 26:25;49).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존경의 태도가 표현될 뿐 아니라 ‘주’를 통해서 세상 심판자의 호칭을 보여준다(마 7:21~22, 25:11;37;46). 마가복음서에서 넘겨받은 메시야의 다윗 아들됨(막 22:41~46)에 관한 논쟁대화에 있어서 ‘주’라는 존칭은 시편 110편 1절에서 파생된 것이다. 또한 마태는 이 호칭의 대부분을 예수의 신성한 권위와 고양된 위상에 맞추어 사용했다(마 8:2;6;8;25, 14:28 등).

마태는 ‘주’라는 칭호를 사용함에 있어서 언제나 메시아,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 다른 칭호들과 관련된 예수로 묘사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다윗적 메시아보다 더 권위 있는 예수 메시아를 설명하기 위해(마 22:42~45), 명하시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 다윗의 자손을 설명하기 위해,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기 위해, 안식일의 규례를 개정하며 재판을 행할 권능을 가지신 예수 인자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마태는 다른 기독론적 칭호를 늘 염두에 뒀기 때문에 ‘주’라는 칭호를 보조적인 용어로 채용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곧 제자들에게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 보통 랍비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주’라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등에서 예수는 은근히 보통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 전체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주’임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스승, 랍비 정도의 의미로 ‘주’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점차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시는 분,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를 행사하시고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주’로 불렀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표징이다.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 우편에 군림하는 예수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고, 그의 주권에 서약하는 것이다.
 
5) 다윗의 자손(아들)

예수의 여러 가지 칭호들 가운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역사와 전통과 유대인의 기대에 뿌리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다윗 같은 임금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와 같은 인물이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메시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하여 다윗과 같은 임금을 보내사 그 백성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의 위대성을 회복하고, 저들이 일찍이 생각하지도 못한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믿었다.

거스리도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라는 계속되는 주제와 예루살렘에의 승리의 입성은 유대 민족의 소망을 성취하는 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유대적 기독교인들의 관심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메시아에 관한 꿈은 다윗의 가계에서의 승리자 또는 해방자, 초인간적인 메시아 대망으로 승화돼 갔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자주 인용되었다. 마태는 복음서 첫 머리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고 했고, 누가는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눅 1:32)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복음서는 예수의 족보를 보증하기 위해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마 1:20, 눅 1:27, 2:4).

사실 예수는 육신으로 말하면 다윗의 아들이다. 또 메시아의 희망과 그 약속을 실현함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해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3~44)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여기 나오는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이요, 두 번째 주는 메시아, 곧 장차 오시리라는 메시아다. 메시아를 다윗이 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다윗의 아들은 예수의 칭호 중에서 가장 유대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과거의 모든 꿈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멀리 초월하신 분이시다.

또한 마태가 이야기하는 다윗의 자손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소외된 자들을 치유하시며 스스로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분이시다. 무엇보다 신학적인 이유와 변증적인 이유로 사용하셨다. 예수가 다윗과 관련된 구약 예언의 성취자인 것, 곧 그가 이스라엘의 왕적 메시아인 것을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마태는 다윗적 메시아가 정치적, 군사적 특징을 갖는 것보다 겸손한 왕, 소외자를 치료하는 왕으로서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묘사했다. 변증법적 이유로도 마태는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그 죄의 책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다. 마태는 이스라엘이 비난하고 거부한 예수에 대한 당시 유대 사회의 소외자(소경, 눈멀고 벙어리된자, 아이들, 이방 여인 등)의 태도를 부각시켰다. 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한 사실은 마태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한 증거가 되며, 또 경고가 되는 것이다.

결국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예수를 장차 올 기름부음 받은 왕에 대한 약속을 성취한, 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원형인 다윗의 후손이라고 고백하는 신약성경의 고백을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칭호가 예수라는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늘의 열쇠를 소유하고 계시고 높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알맞은 칭호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6.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예수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신적인 모습(신성)을 강조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요한은 이 세상에서 거하며 활동하는 지상의 인물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하늘의 인물이란 두 초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도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칭호가 사용됐다. ‘로고스’(1:1;14), ‘하나님’(1:1, 20:28), ‘아들’(3:35~36, 5:19;22;23;25, 6:40, 8:35~36, 14:13), ‘하나님의 어린 양’(1:29;36), ‘하나님의 아들’(1:34;49, 3:16~18, 10:36, 11:4;27, 20:31), ‘메시아’(=그리스도, 1:41), ‘이스라엘의 왕’(1:49, 12:13), ‘인자’(3:13, 6:62),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6:69), ‘세상의 구주’(4:42), ‘랍비’(1:38;49, 5:7, 6:23;34;68), ‘주’(4:1;11;15;19;49, 5:7, 6:23;34;68), ‘선생’(1:38, 20:16, 3:2;10, 11:28, 13:13~14), ‘예언자’(4:19, 6:14, 7:40, 9:17)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1) 로고스(말씀)

예수의 칭호로 사용된 ‘로고스’(말씀)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요한의 저작에서만 나온다(요 1:1;14, 요일 1:1, 계 19:13). 이 단어는 요한만이 사용한 예수의 명칭이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는 진술은 ‘로고스’의 신성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로고스는 그리스도와 세상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창조에 있어서 로고스의 역할은 특별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성육이다. 이는 로고스가 예수가 인간과 같은 성품이 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로고스의 성육에 있어서 예수가 지닌 육체, 곧 인성은 완전한 인성이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결국 요한의 ‘로고스’ 개념은 하나님과 동질인 영원하시며 선재하시며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로고스의 속성이 생명, 빛, 은혜와 진리로 규정되어졌다. 새로운 피조물과 새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믿음의 은혜와 그 은혜의 내용인 진리를 내려주신 것이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는 결국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구속과 그것이 성취된 신약 세계의 구속적인 전통에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물론 요한복음은 예수를 직접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그 성질과 존재가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다. 1장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지만 직접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밝히진 않았다. 반면 20장 28절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도마는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도마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늘날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고스’이신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다. 이런 측면에서 ‘로고스’는 하나님과 예수를 궁극적으로 완성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로고스가 육신이 됐다. 하나님과 하나이듯이 사람과 하나가 되신 것이다.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표현해주고 있는 로고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와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2) ‘나는 ~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의 표상어를 가진 ‘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사용된 ‘에고 에이미’(나다)라는 말씀으로써 모두 7차례에 걸쳐 나온다. 표상어를 가진 이와 같은 자기 칭호에는 대부분 하나의 조건문 혹은 초대와 구원의 약속이 따른다.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로 나타내면서 이상적인 목자로 그려지고 있다. 양 떼와 참 목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참 목자는 양떼들을 개별적으로 알고(3절),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며(4절), 양떼들은 참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를 온전히 신뢰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친숙하게 알아야 하며, 백성들은 예수의 지도력을 확신하면서 예수가 백성들을 어떤 위험으로도 이끌고 가지 않을 것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양들을 위해 생명을 건 희생이다. 11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예수는 ‘나는 ~이다’를 사용해 자신의 존재를 이동시키기도 하신다. 예수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라고 했을 때 예수의 신성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자신을 빵이자 빛이자 진리라고 부를 때 신성이 인성이 되었다는 것(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는 ‘나는 ~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설명하신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계신 예수가 인간이 믿고 따라야 할 참 하나님, 인도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스스로 선포하신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절대 신성을 가지신 성자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곧 우리 모두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를 통한 구원은 절대 완전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고(3:16~17), 아들의 계시 전권과 아버지 일에의 참여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3:35, 5:20~23), 아들 안에서 믿는 자에게 열려지는 구원의 가능성(3:16, 6:40), 믿지 않는 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심판(3:36, 5:22), 아들 안에서(14:13) 혹은 아들을 통해(17:1) 받으시는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호칭은 예수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신 일을 보았던 대로 행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이 구절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의존성을 강조하지만 다른 구절에 보면 종종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이 발견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생명을 주고(5:21),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8:36), 아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고(3:36, 6:40),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판권을 준다(5:22).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하고 아버지와 완벽하게 구별할 수 없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앙적 고백으로 사용됐다. 예수는 ‘위로부터 나신 분’, 또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점차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은 아주 핵심적인 그리고 중요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인식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말씀이 하나님이다”(1:1)라고 말한 것과 도마가 예수를 가리켜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20:28)이라고 고백한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4) 인자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호칭은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용법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다. 요한은 인자의 선재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승천과 영광도 강조했다. 곧 예수의 인성을 강조했다는 말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자기 계시’라는 성격으로 사용한다. 그 배경에 들어 있는 사상은 모든 인간의 원형이 예수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 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다시 올라가는 분이다(3:13, 6:62).

인자인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됨을 유지하고, 하나님과 함께 머문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며 진리를 집약하는 존재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궁극적 관계의 원형이다. 그가 하늘에 둔 기원은 그의 궁극적 고양과 영광뿐 아니라 구원 역사의 기초가 된다. 아버지는 이미 인자에게 그의 인장을 찍어주었고(6:27), 그는 아버지에게서 초월적인 메시지를 받았다(3:11~13). 이는 미래에 이루어질 재림의 보증이 된다(6:62). 지상에서 인자를 만나면 바로 신성한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7.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점

지금까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칭호에 대해 살펴봤다. 동일한 자료를 중심으로 저자의 의도에 따라 기술된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는 구약의 메시아 예언에 대한 성취로써, 주로 역사적 측면에서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에 주로 동일하게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 인자(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주, 다윗의 자손(아들) 등과 같은 예수의 호칭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가복음은 많은 사람의 죄 용서와 속량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고난 받는 메시아, 인자, 하나님의 종으로 증거하고 있다(막 10:45, 14:22~24). 마태복음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구약의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이해한다. 누가복음은 구약의 고난 받는 의인의 전승의 맥락에서 예수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당위로 이해한다.

물론 공관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의 메시아의 부활과 승리를 전파하고 있으며, 예수를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의로운 메시아로, 인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의 인도자이며 구세주로 고백한다.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세상(=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이해한다. 물론 요한복음도 예수의 죽음을 전통적인 초대교회 구원론의 입장에서 고찰한다. 하지만 요한의 특징은 그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부활의 영광과 승리의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자로서 공생애의 마침이자 종결로 묘사되고 있고, 아버지에게로의 복귀로 이해되고 있다(요 13~17장).

특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의 칭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신성’에 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전지전능한 분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지혜와 은총이 날로 자랐지만(눅 2:52), 종말의 날을 알지 못한 듯이 보이며(막 13:32), 극심한 고통을 겪고(눅 22:40~42),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부르짖는다. 예수는 유혹을 받았으며(마 4:1~11, 눅 4:1~13), 죽음으로 인해 그만 악의 힘에 눌려버린다.

그렇다고 요한복음이 예수의 인성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수의 피곤(4:6), 갈증(4:7), 눈물을 흘리심(11:35), 민망히 여기심(12:27),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심(19:30, 42) 등의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점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이 세상의 참된 메시아, 구세주 등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공관복음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예수의 ‘신성’이 더 부각됐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은 ‘나는 ~이다’라는 표현으로 예수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말해준다. 요한복음은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법을 직접 성취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완전한 인성까지 취하신 후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어 절대적 구원을 보장하시는 사랑과 능력으로 구주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공관복음에서 나타난 예수의 칭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신 분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요한복음은 이를 뒷받침해주면서 동시에 그 ‘구속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이 곧 예수이시며, 예수가 곧 하나님이심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8. 결론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앙고백은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속성과 삶, 가르침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마태복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 메시아 곧 왕으로서의 예수를 모습을 강조한다. 마가는 예수를 섬기고 일하시는 종, 고난 받는 종, 승리의 종으로 묘사하는 등 구속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의 종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단지 종의 신분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의 겸손과 아울러 그가 베푸는 놀라운 이적과 신적 선언까지 기록함으로써 원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자원해 종의 역할까지 담당했음을 다른 복음서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를 죄로부터 순결한 우리가 흠모할만한 완전하고도 유일한 인자로 소개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의 모든 면을 포괄하면서 예수가 곧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 구속의 법을 직접 성취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죄인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오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직(하나님과의 관계)과 수평(세상, 인간과의 관계)적 삶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관련된 모든 칭호는 인류의 절대적 구원을 보장해주는 능력과 사랑의 이름임이 확실하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세상)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만큼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명감을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

특히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은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성화’의 단계를 말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칭호에서 성화의 참된 의미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수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속사적 경륜의 성취를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오직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실제 역사의 사실에 근거한 구속의 원리에 의한 구원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가 참 구원의 길임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부과된 영적 사명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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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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