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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만인사제주의’, 한국 교회는 과연 적용하고 있는가? 본문

역사와 신학

루터의 ‘만인사제주의’, 한국 교회는 과연 적용하고 있는가?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6:34

 

기독연구원 느헤미야ㆍ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포럼’ 개최 / 2014년 11월 3일 기사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이 지난달 30일 '루터, 한국 교회 사제주의를 다시 말하다'를 주제로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 연합포럼을 개최했다.(사진제공:느헤미야)

마틴 루터는 지난 1517년 10월 31일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며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 루터의 이 행동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됐다.

그로부터 497주년이 되는 올해.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이 루터가 강조했던 ‘만인사제주의’에 대하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진행했다. 지난 10월 30일 오후 7시 백주년기념교회 교육관에서는 ‘루터, 한국 교회 사제주의를 다시 말하다’는 주제의 연합포럼이 개최됐다.

이날 배덕만 교수(복음신대)와 황병구 재단본부장(한빛누리)가 발제자로 참여해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와 ‘한국 교회는 과연 만인사제주의를 아는가?’를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 이후에는 고상환 사무처장(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사회로 발표자들과 김은홍 편집장(CTK), 박득훈 목사(새맘교회) 등이 패널토론을 진행하며, 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한국교회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토론을 이어갔다. 한편, 이날 발표된 발제자들의 주장을 요약해 정리했다.

#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 배덕만

만인사제주의, 하향평준화와 무정부주의 초래할 수 있어

1. ‘만인사제주의’는 루터가 교회와 인류에 남긴 소중한 유산 중 하나다. 루터 자신은 만인사제주의라는 말을 직접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 사상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토대로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동시에 개신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가 됐다.

2. 만인사제주의는 루터가 1920년에 작성한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루터의 이 논문은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 주위에 세운 세 가지 장벽들을 다루는 전반부와 공의회에서 다룰 구체적인 의제들을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3. 루터의 논문에서는 (1) 교황청이 제국 내 교회 고위직을 점점 독식해 의심스러운 사안을 로마에 유익하게 결정한다. (2)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황청에 점차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한다 (3) 교회의 송사문제를 로마로 이첩하여 그 곳에서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등의 불만사항이 상당부분 반영됐다.

4. 루터는 성직자들에게 개혁의 개혁의지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 중심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로마교도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세 가지 장벽에 대해 조목조목 폭로했다. 그 장벽들은 첫째, 로마교도들은 세속권력에 의해 억압을 당하면 법령들을 만들어 세속권력은 자신들에 대해 아무런 지배권도 없으며, 오히려 영적권력이 세속권력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로마교도들은 성서에 근거해 책망하려고 하면 자신들은 교황 외에 아무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셋째, 로마교도들은 공의회에 의하여 위협을 받으면 교황 외에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것이다.

5. 세 가지 장벽들을 비판한 루터는 교황의 독재를 제어하기 위해 주교들의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던 과거의 공의회주의자들처럼 공의회소집을 요청하면서 평신도들의 공의회 소집권을 주장했다. 그는 교황의 공의회 소집권을 정당화했던 교회법을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부정하면서 교황이 소집했던 공의회보다 황제에 의해 소집됐던 공의회가 더 기독교적이었다고 역설했다.

6. 루터는 ‘성속이원론’, ‘독단적 성서해석’, ‘공의회 독점’ 같은 주장들이 신학적으로 교황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교회의 타락을 가속시켰다고 진단했다. 즉, 교황이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런 주장들로 정당화하고, 그런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고위성직자들과 교황청 직원들의 수가 기형적으로 확대됐다.

7. 결국 교황청은 사치와 타락의 온상으로 변질됐으며, 이런 조직과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요구됐으며, 그런 현실적 필요에 따라 면죄부 판매로 상징되는 기만적 제도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기 위해서 루터는 교회법 대신 성경에 근거해서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를 부정하는 ‘만인사제직’을 주장했고, 독일귀족으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에게 교회개혁의 책임을 부여했던 것이다.

8. 이와 같은 루터의 비판과 주장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법이나 관행보다 성경에 근거해서 전개했다. 교회는 한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성경의 토대 위에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9. 하지만 이런 긍정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독일귀족에게 고함’에서 전개된 루터의 사상에는 또 다른 모순과 위험도 존재한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교회법이나 전통보다 성경에 근거했다. 원칙적으로 그의 주장을 정당하나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해결할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10. 또한 루터는 공의회 소집권을 교황이 독점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평신도들에 의한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콘스탄틴의 니케아회의 소집을 역사적 전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이런 행위는 교회역사에서 서임권 논쟁을 포함한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갈등, 세속권력에 의한 교회지배 및 세속화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세속권력의 보호 아래 진행된 루터의 종교개혁 자체가 후에 급격히 보수화됐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1. 루터는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철폐했고,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요, 주교요, 교황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이후 개신교의 역사는 그의 주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던 형제교회들과 여전히 사제중심주의를 지향하는 감독교회들로 양분돼 진행됐다. 이것은 만인사제주의를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단적인 증거다.

12. 더욱이 평신도들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교육과 관리가 병행되지 않으면 자칫 만인사제주의는 교회의 하향평준화와 무정부주의를 초래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를 현재 한국 교회에 적응할 때, 우리는 허와 실을 면밀히 검토하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 배덕만 교수

# 한국 교회는 만인사제주의를 아는가? / 황병구 재단본부장

“사제는 직분이나 신분이 아니라 역할이다”

1. 유럽지역에 많은 종교개혁의 흐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개혁은 그나마 당시의 사제(지금의 목회자) 그룹이 자체개혁을 한 경우였다. 루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고, 이른바 평신도들의 개혁운동은 협력의 전선과 동력을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2. 전략적인 선택으로서 각성된 목회자들의 자발적 교회개혁이 현실적으로 또 상대적으로 더욱 유효하고 절실하다는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진적인 자체개혁론이 빠질 수 있는 한계는 정치적으로 비유하자면 정권교체가 아닌 정권재창출이 갖는 한계와 유사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직업목회자들이 아닌 일반 성도들이 개혁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에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3. 성도들에게는 피차 한 인간으로 직업목회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반 성도들은 직업목회자들을 친구로 사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직업목회자들에게도 삶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 일반 성도들과 직업목회자는 서로 의존하는 우정 관계의 회복이 필요하다.

4. 성도들의 삶을 참된 영성의 주된 현장이라는 구체적인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곳에 거한다는 것이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자부심이 전해져야 한다. 도리어 직업목회자의 일상은 영적 성장의 본류와는 거리가 있다는 자각이 일어나야 한다. 성도들이 엄두를 내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이 직업목회자의 일상보다 거룩할 수 있다는 해석을 해내도록 말이다.

5.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참된 사제는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복음을 전하고 인생을 건져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직업목회자와 성도의 구별이 없으며 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사제다.

6. 사제라는 개념과 정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직분이나 신분이 아니라 역할이다.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누구의 몫이며 자격있는 자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 긴급한 역할과 본질적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싶다.

7. 조만간 이름도 빛도 없이 진정한 사제의 역할을 감당한 그들의 수고를 겸손히 인정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도래하길 바란다. 아마도 확신컨대 직업목회자가 아닌 직업 성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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