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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마틴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본문

역사와 신학

[원문] 마틴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6:34

2014년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포럼에서 배덕만 교수(복음신대) 발표 / 2014년 11월 3일 기사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 배덕만

I. 서론

   
▲ 배덕만 교수(복음신대)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교계와 학계의 움직임이 자못 진지하다. 동시에, 내일(10월 31일)은 올해의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더듬으며 한국교회의 현실을 반성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신학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성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통해 가톨릭의 구원론에 반대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중심의 개신교회를 탄생시켰다. 그의 종교개혁이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은 측량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단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만인사제주의’도 루터가 교회와 인류에 남긴 소중한 유산 중 하나다. 루터 자신은 ‘만인사제주의’(universal priesthood/ priesthood of all believers)란 말을 직접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 사상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토대로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동시에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이 만인사제주의는 루터가 1920년에 작성한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루터의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논문을 분석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루터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주의에 반대하여 평신도들의 가치를 부각시킨 이유와 주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루터의 논문에 대한 분석과 평가로 구성될 것이다.

II. 본론

1. 배경과 반응

(1) 배경


루터는 1519년 말부터 1520년 초까지 성서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진영에서는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의 영향 하에, 추기경들이 모여 루터를 파문할 교황의 교서,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준비하고 있었다. 1520년 5월 말에 이 교서의 윤곽이 드러나고 추기경 회의에서 최종심의가 임박하자, 루터에게 자신의 입장을 취소하도록 종용하라고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통첩이 6월 초에 프리드리히에게 전달되자, 그는 루터와 이 문제를 상의하여 ‘안전한 장소에서 이 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하는 내용의 답변을 8월 초에 교황청에 통보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는 도중에, 즉 1520년 6월 15일에 그 교황의 교서가 완성되어 공포되었다.

이 교서는 루터의 여러 저서에서 41개의 문장을 뽑아 열거하고, 이 문장들이 반론의 과정 없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소개하거나 확산시키는 사람은 파문이나 교회가 정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명기했으며, 교회의 주무기관은 이 글들을 즉시 압류해서 공개적으로 소각해야 하고, 루터가 허락 없이 공의회에 이 문제를 호소했기 때문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에게 철회할 수 있는 60일간의 기간이 주어졌으며, 이제부터 설교할 수 없게 된 루터는 글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로마에 직접 출두하도록 요구했다. 철회를 거부할 경우,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완고한 이단으로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교황 레오10세는 히에로니무스 알레안더와 교황청 대사 요한네스 에크에게 제국 전체에 이 파문위협교서를 포고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루터의 교리에 대한 교회의 최종적 입장이 결정되었고, 그의 ‘이단적인’ 저서들을 폐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루터의 사상과 글, 그리고 루터 자신이 큰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1520년 6월 중순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8월 상순에 출판했으며, 작센 선제후는 에크가 교황에 순종해야 할 그의 의무를 상기시켰을 때조차도 자신의 지역에서 교서의 집행과 공표를 거부했다. 루터는 12월 초에 에크의 작품들과 교회에서 교황 관할권의 기초가 되었던 여러 권의 교회법, 그리고 이 교서를 비텐베르크 문들 앞에서 불태움으로써, 루비콘 강을 건넜다.

(2) 영향

루터가 이 글을 작성할 때, 두 가지 요인이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독일귀족들이 작성했던 『독일 민족의 불만들』(1456)이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제국의 고위 귀족들은 이 글을 통해 시정을 바라는 요구사항들을 교황청에 계속 제출해 왔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교회적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교황에게 밀려 국가적 이득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독일 귀족들은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통치 때인 1510년과 1518년에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이 문서를 제출했다. 이 문헌을 통해 제기된 불만은 세 가지였다. (1)교황청이 제국 내의 교회 고위직을 점점 독식하여 의심스러운 사안을 로마에 유익하게 결정한다. (2)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황청에 점차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한다. (3)교회의 송사문제를 로마로 이첩하여 그곳에서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이런 불만사항이 루터의 논문에 상당부분 반영된 것이다.

또한 루터의 논문이 제기한 개혁 요구는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내용과 매우 비슷했다.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1520년 이전에 이미 인문주의자들과 대화망을 구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일을 위해 멜란히톤이 중요한 중간 역할을 했다. 이들은 스콜라 신학과 미신적인 형식의 경건과 싸우기 위해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특히, 순례, 하위성직자들의 독신, 수많은 미사, 탁발수도회, 미신적인 성인숭배를 폐지해야 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요구와 상당부분 일치했다.

(3) 반응

1520년 8월에 4천부를 찍은 이 책의 비텐베르크 초판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매진되었기에, 루터는 바로 제2판을 준비해야 했다. 이 책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인쇄되어 같은 해에 가장 많이 판매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이 되었다. 곧이어 스트라스부르의 토마스 무르너와 히에로니무스 엠저가 루터의 이 책에 대해 반박서를 씀으로써, 논쟁과 갈등이 더욱 고조확산되었다.

2. 구성과 내용

루터의 이 논문은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 주위에 세운 세 가지 장벽들을 다루는 전반부와 공의회에서 다룰 구체적인 의제들을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먼저, 루터는 서문에서 이 논문을 자신의 절친한 벗이자 강력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스 폰 암스도르프(Nicholas von Amsdorf, 1483-1565)에게 헌정하면서, 자신이 이 글을 집필한 일차적 이유를 밝혔다. 루터는 자신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으며, 성직자들에게 개혁의지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 중심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3:7) 침묵을 지킬 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까지 나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 계획에 따라서 그리스도교계의 개선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모아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평신도의 노력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도와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을 당연히 더 행해야 할 성직자가 전혀 무관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루터는 로마교도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세 가지 장벽을 세웠는데, “이것이 전 그리스도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그 장벽들의 기만성을 조목조목 폭로했다. 루터가 발견한 세 가지 장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교도들은 세속권력에 의하여 억압을 당하면 법령들을 만들어 세속권력은 자신들에 대해 아무런 지배권도 없으며 오히려 영적권력이 세속권력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로마교도들은 성서에 근거하여 책망하려고 하면 자신들은 교황 외에 아무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셋째, 로마교도들은 공의회에 의하여 위협을 받으면 교황 외에 아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먼저, 첫 장벽에 대한 루터의 비판을 직접 들어보자.

교황, 주교들,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여기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찬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오히려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체발하고 서품을 하고 봉헌례를 하거나 또는 평신도와는 다른 옷을 입는 일은 위선자와 조상(anointed image)들을 만들 것이다. 이런 것은 결코 크리스천이나 ‘영적인’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그리하여 현세적인 관헌들은 우리와 같은 세례로 세례를 받고 또 같은 신앙과 복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사제와 주교로 인정하여야 하며, 그들의 직무를 그리스도교계에서 특유하고 유용한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의 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성별된 사제이고 주교이고 교황이라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모든 것에서 그들이 말하는바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마치 모든 사제들과 승려들이 똑같은 일을 맡지 않는 것처럼 비록 그들이 다 같은 일에 종사하지는 않으나 그들은 다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곧 이들은 참 사제들이며 주교들이며 교황들인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롬12:4이하와 고전12:12 이하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며, 벧전2:9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이다. 곧 우리는 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다 서로에게 대하여 지체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두 몸 곧, 하나는 “현세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한 머리와 한 몸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루터는 롬12:4, 고전12:12, 벧전2:9 등을 토대로,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신앙, 복음을 통해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직무의 차이는 존재하나 신분의 차이는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직”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장벽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은 우리 가운데 진실한 신앙, 영, 이해, 그리스도의 말씀과 정신을 가진 경건한 크리스찬들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사람들의 말과 이해를 거부하고 신앙도 영도 없는 교황을 따라야 하는가? 이것은 모든 신앙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신조의 조항이 옳다며 언제나 바른 것은 교황만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로마의 교황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 인간으로 격하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악마적이고 흉악한 과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다 사제들이고 다 한 신앙과 한 복음과 한 성례를 가지고 있다면, 왜 신앙문제에 관하여 바르고 그른 것을 시험하고 판단할 권능을 가져서는 안 되는가? 고전2:15에서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라고 한 바울의 말과 또 고후4:13에서 “우리는 다 신앙의 동일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신적인 교황이 하는 것처럼 무엇이 신앙에 적합하고 무엇이 적합하지 않은가를 파악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말해 온 모든 말과 다른 많은 본문에 의하여 대담하게 되고 자유롭게 되어, 바울이 지칭하는바 자유의 영이 교황들의 날조로 인하여 위협을 당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신앙에 근거한 우리의 성서해석에 따라 교황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을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교황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더 좋은 해석에 따르도록 억지로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루터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했던 첫 번째 장벽을 공격한 후, 성경해석의 권리에 대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양자의 본질적 동일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즉, 루터는 교회법이나 전통 대신, 성경과 자신의 교회론에 근거해서 교황의 성경해석 독점권을 비판했고, 신앙, 이성, 성경, 성령을 소유한 모든 신자들이 동일한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교회개혁에 나서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세 번째 장벽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성서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만 그들 자신의 법령에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령은 그리스도계에 해를 끼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율법에 배치되지 않는 한에만 유효한 것이다. 교황이 징벌을 받아 마땅할 때에는 이러한 법령들이 무효로 돌아간다. 그것은 공의회에 의하여 교황을 벌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계에 해를 끼치게 되는 때문이다.

따라서 행15:6을 읽으면 사도회의를 소집한 것이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그 권한이 사도 베드로에게만 속했었다면 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적인 공의회가 아니고 이단적인 집단이었을 것이다. 모든 공의회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니케아공의회까지도 로마의 주교에 의해서가 아니고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고 확인되었으며, 콘스탄틴 황제 이후 다른 많은 황제들도 이와 같이 하였으나 이 공의회들은 모든 공의회 중에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교황만이 공의회들을 소집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이 모든 공의회들은 이단적인 공의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교황이 만들어낸 공의회들을 고찰해 본다면, 그것들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루터는 교황의 독재를 제어하기 위해 주교들의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던 과거의 공의회주의자들처럼, 공의회소집을 요청하면서 평신도들의 공의회 소집권을 주장했다. 그는 교황의 공의회 소집권을 정당화했던 교회법을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부정하면서, 교황이 소집했던 공의회보다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던 공의회가 더 기독교적이었다고 역설했다.

이어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 할 교황제의 가장 심각한 세 가지 폐해들을 열거했고, 이에 대한 실제적 대안들을 27개로 정리했다. 먼저, 루터는 교황제를 둘러싼 현실적 문제들로, (1)교황의 세속적 권력과 사치 (2)제후 대접을 해야 하는 수많은 추기경 (3)지나치게 많은 직원을 둔 거대한 교황청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교황제를 둘러싼 조직과 제도가 기형적으로 비대해지면서 이를 운영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필요했고, 결국 이런 경제적 필요가 교회를 부패와 타락으로 이끌었다는 판단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구조 속에서 교황은 끊임없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기만적인 제도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교황은 독일의 모든 영지로부터 첫 해 세입의 절반을 징수할 목적으로 ‘첫해 수입세’를 만들었고, 터키인들과 전쟁한다는 명목으로 ‘사라센 세’를 징수했으며, 거액을 받고 주교직을 매매했다. 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수익 많은 수도원이나 교회를 추기경이나 다른 부하에게 위탁하여 관리하게 함으로써, 그 수입을 챙겼던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 루터는 구체적 개선방안으로, 첫 수입세의 폐지, 로마의 임명에 대한 금지, 개교회의 권리회복, 교황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를 배제함, 독일교회의 조직, 교황 가족의 축소, 교황에 대한 지나친 숭배 금지, 로마순례 폐지, 탁발 수도회 개혁, 성직자들의 결혼, 죽은 자의 미사 폐지, 성사금지의 폐지, 성자의 날 폐지, 사면권의 확대, 순례 금지, 특권 금지, 거지 생활을 금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무용한 미사 금지, 보헤미야 사람들 문제, 대학교 개혁, 교회법 폐지, 세속법 축소 등을 제안했다. 결국, 그가 제안한 방안은 몇 가지 미신과 신학적제도적 오류에 관한 것도 포함했지만, 절대다수가 교황의 부당한 정치권력과 금전적 탐욕을 통제하려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III. 글을 마치며: 평가와 적용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게시했던 ‘95개조 반박문’은 결코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가 아니었다. 다만, 성베드로성당의 건축을 위해 판매하던 면죄부의 신학적 왜곡과 그 판매를 가능하게 했던 교황의 권력남용을 비판하면서, 진지한 신학적 토론을 제안했을 뿐이다. 당시에 그는 교황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그의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뇌관을 건드렸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루터의 관심과 투쟁은 면죄부를 넘어, 교회타락의 원천인 부패한 교황제로 확장되었고, 이것은 다시 “만인사제직”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성속이원론, 독단적 성서해석, 공의회 독점’ 같은 주장들이 신학적으로 교황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교회의 타락을 가속시켰다고 진단했다. 즉, 교황이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런 주장들로 정당화하고, 그런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고위성직자들과 교황청직원들의 수가 기형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교황청은 사치와 타락의 온상으로 변질되었고, 이런 조직과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었으며, 그런 현실적 필요에 따라 면죄부 판매로 상징되는 기만적 제도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기 위해서, 루터는 교회법 대신 성경에 근거해서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를 부정하는 만인사제직을 주장했고, 독일귀족으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에게 교회개혁의 책임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런 루터의 비판과 주장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법이나 관행보다 성경에 근거해서 전개했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교회사에 전해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교회가 한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성경의 토대 위에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루터는 사제와 평신도를 근본적으로 구분했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가치와 책임을 새롭게 정의했다.

이것은 중세봉건제가 붕괴되고 근대시민사회로 전환하는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루터의 교황제 비판은 ‘주교 없이 교회도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전통적 교회론 대신,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성경적 교회론을 회복시켰다. 이런 교회론은 교회의 공동체성 및 평신도들의 주체적 참여를 자극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끝으로, 루터는 교황제 부패의 근본원인을 ‘돈’에서 찾았다. 기형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왜곡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타락이 일차적으로 신학적 왜곡이 아니라, 물질적 탐욕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독일 귀족에 고함』에서 전개된 루터의 사상 속에는 또 다른 모순과 위험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교회법이나 전통보다 성경에 근거했다. 원칙적으로 그의 주장은 정당하나,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해결할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와의 싸움에서 유효했던 이 주장이 종교개혁자들 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성만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루터, 츠빙글리, 칼뱅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했고, 결국 종교개혁진영이 분열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법 대신 성경’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현실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둘째, 루터는 공의회 소집권을 교황이 독점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평신도들에 의한 공의회소집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콘스탄틴의 니케아회의 소집을 역사적 전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이런 행위는 교회역사에서 서임권논쟁을 포함한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갈등, 세속권력에 의한 교회지배 및 세속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세속권력의 보호 아래 진행된 루터의 종교개혁 자체가 후에 급격히 보수화되었던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루터는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철폐했고,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요 주교요 교황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이후 개신교의 역사는 그의 주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던 형제교회들과 여전히 사제중심주의를 지향하는 감독교회들로 양분되어 진행되었다. 이것은 만인사제주의를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단적인 증거다. 더욱이 평신도들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교육과 관리가 병행되지 않으면, 자칫 만인사제주의는 교회의 하향평준화와 무정부주의를 초래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를 현재 한국교회에 적용할 때, 우리는 허와 실을 면밀히 검토하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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