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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종교개혁 500년, 무엇을 개혁해 왔는가? 본문

역사와 신학

[원문] 종교개혁 500년, 무엇을 개혁해 왔는가?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6:36

서창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역사신학) / 2014년 11월 3일 기사

 

* 하단의 내용은 언약교회(담임:박주동 목사)가 지난 11월 1일부터 2일까지 진행한 ‘종교개혁 기념강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주최 측이 발표문을 제공해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교회는 무엇을 개혁해 왔는가?
그리고 뭘 더 개혁해야 하는가?
/ 서창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장)

   
▲ 서창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장)
500년 전의 종교개혁운동은 미완성이었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있고 당시에도 개혁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이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의 개혁의 기치를 높인 교회개혁운동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활발한 개신교 국가들과 성도들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개혁가들이 남긴 구호가 증명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교황권과 교회 전통의 권위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때에 기록된 성경의 최고 권위를 주창하고 그 말씀 선포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어둠속에 눈부신 말씀의 빛을 쏟아냈다. 그 결과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비성경적인 중세 교회개혁의 불길은 급속히 타올랐다. 유럽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당시 로마교가 개혁사상을 다 수용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역사상 참혹한 종교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세계 복음화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해를 거듭하면서 신학적 차이나 혹은 정치 권력적 야욕에 의한 분열의 분열을 낳아 사회와 국가에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은 현대 사회에서 접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길을 갔을 것이다.

어째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개신교는 계속해서 개혁의 불길을 끄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모색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개신교의 눈으로 본 가톨릭교회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혼합 종교적 색채와 종교다원주의 사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종교이다. 그렇다고 개신교는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톨릭과 직제 일치 운동을 벌이고 있고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동시에 교권정치와 세속주의에 휘둘려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에서 밀려나 버린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자들은 개혁된 교회일지라도 여전히 개혁해 가야 하는 절대적 명제 앞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는 작업은 매우 필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교회에서 주최하여 오늘의 개혁교회 현주소를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는 귀한 시간을 가진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상일동 한 귀퉁이에서 외치는 우리의 소리는 미미하게 들려질지 몰라도 우리들의 수고와 땀은 하나님 나라 구현에 귀한 밑거름이 될 것을 확신하다. 다만 본 강의를 맡은 사람의 부족함 때문에 개혁교회의 외침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고 죄송할 따름이다.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하늘의 뇌성을 발해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강의에 임하고자 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심겨진 교회역사 속에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눈여겨보고자 한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소리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솟구치고 있었다. 종교개혁 490주년 때 <기독교 사회책임>이라는 NGO단체에서 임병곤 씨가 발표한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개혁해야하는가? 우선 본질적으로 1)왜곡된 성공주의 2) 물량주의와 대형화 3) 개교회주의와 사회적 소통부족 4) 무속화와 양극화 5) 신학을 위한 신학교육의 문제 등이다.’

또 ‘한국교회는 어디를 개혁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목회자(자질, 소명의식, 성결한 삶, 명예욕, 물질관리 등이다). 2)신학교(신학대학은 수를 줄이고 군소신학은 통합하고 자격미달은 폐지한다.) 3)교회연합기관(완전히 뜯어 고치거나 새로만 들어서 성경적 정책기능과 대 사회적 기능과 개혁자정을 하는 명실상부한 기관과 실무자들이 필요하다.) 4)양극화 문제( 80-90%의 작은 교회를 외면하고 진진하게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대형교회도 결국 함께 어려워진다.)’

작년 미래목회포럼(오정호 대표)에서 ‘오늘의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이라는 주제로 496주년 행사를 하면서 공공성회복과 교회 분열과 부패에 대한 회복, 목회자의 윤리의식 회복으로 인한 영적 회복을 촉구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이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장들은 참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진정한 성도라면 한국의 교회가 이대로는 아니된다는 느낌은 다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 모든 외침들을 종하해 볼 때 공통적인 지적은 우선적으로 목회자의 개혁과 교회연합을 통한 공공성 회복 문제를 들고 있다.
 
목회자의 양산문제에서 불거지는 자질 문제나 소명감 혹은 윤리 도덕적 타락현상 등이 반영한 심각한 것 진단이라고 본다. 그리고 주님의 보편적 교회 세우기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방향설정에 있어서 실질적인 대안들은 각각이 다르다.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고 또 장로회주의 원리가 지향하고 있는 보편적 교회관, 공공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오늘 종교개혁 500년 어디까지 왔는지를 다시 한 번 조명하며 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 강단사역의 개혁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말씀회복운동이라고 간주할 때 성경에 대한 무지를 깨뜨리고 성직자들의 부적격한 기준들을 상당히 고품격화 시킨 놀라운 열매를 맺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세시대의 교회들, 특히 스코틀랜드의 예를 들면 강단에서 외치던 메시지들은 설교 본문을 전적으로 성경에서 취하지 않았다. 강단에서의 외침을 통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보다 신나게 웃게 만드는 재미난 이야기책인 ‘Gesta Romanorum’이라는 이상한 책을 주로 인용하였다.

감독들은 설교할 줄 몰랐으며 교구 신부들은 고해성사에 만족하였고 형식적으로 라틴어로 된 예배집전에 만족하였다. 교회의 의전은 사문화되어 무의미한 반복이었다. 그러한 때에 존 녹스와 그의 동료들은 설교사역을 통하여 성경을 생생히 살아있는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주된 구호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교회 예배와 교육과 제도와 사회 전반의 사상적 기반을 구축한 것이 되었다. 그 말씀에 기초한 스코틀랜드를 재형성하고자 했다.

루터에 의해서 점화된 종교개혁운동은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말씀 사역을 필두로 존 녹스의 성경에 충실한 개혁의 외침이 가세하면서 수많은 영혼들을 진리에 눈 뜨게 하였고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 온전히 세워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된 것만이 아니라 녹스에 의해서 주도된 1558년 제네바 영어 성경의 출판은 영국의 교회 개혁운동에 기름을 부은 것이 되었다. 진리의 능력을 굳게 붙든 많은 설교자들이 전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진리에 목말라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였다.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고난당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간주하며 천성을 향한 영혼들의 행진의 줄을 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은 항상 말씀회복운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수많은 말씀 선포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각성운동 역시 교회개혁운동이요 말씀회복운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개신교회 상당수가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취를 감추었던 스코틀랜드에서도 지금은 가톨릭교회가 절반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가톨릭교회의 신장은 개신교 성장과 방불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올해 천주교에서 발표한 신자의 수는 530만 명에 이르렀다.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려 성경진리의 위력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권위는 상실되고 인간의 기호가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둔갑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풍조에 발맞추어 현대 교회의 설교자들 역시 신종 ‘게스타 로마노룸’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적이고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들을 쏟아놓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목회자들을 지니고 있는 한국의 교회에 설교 표절이 90%에 이른다는 어느 기관의 보고가 있듯이 목사는 성경진리를 풀어 증거하여 심령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이 아니라 교훈적이고 시사적이며 윤리 도덕적인 훈계를 제시하는 서당선생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강단은 진리의 샘터가 되지 아니하고 감동적인 아름다운 말들을 가지고서 사회생활에 유용한 정보제공자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의 위상을 급속하게 저하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담화로는 변혁을 결코 꿈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1). 지혜의 아름다운 화려한 말잔치의 무성함은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위력을 결코 드러내지 못한다. 복음의 위력이 가려지는 말의 화려함은 갈수록 교회를 존중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기보다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오죽하면 개신교도들을 말만 잘하고 행함이 없는 자들이라고 조소하고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목사들의 말, 성도들의 말이 어떠한지를 살펴볼 것이 아니라 능력이 어떠한지를 세세히 점검해야 한다.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위안과 격려 혹은 도전의 말이 아니라 영혼이 소생함을 받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가를 보아야 한다.

목사 개인의 지식의 출중함이 성도들 가운데 회심의 역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 욕구 충족을 요구하는 곳이든, 또는 신비적인 현상들을 사모하는 곳이든 사도들이 남겨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한 곳도 없다. 그들이 들어야 할 것은 지적 충족을 위한 지혜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의 능력이다.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사랑하여 감격해하는 심령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교회생활에 익숙한 교인수가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하다. 교회 다니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살아가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하다. 물론 자선사업이나 선행에 남다른 본을 보이는 것이 기독교인의 초상화는 아니다. 불신자들 중에도 그러한 면에 탁월한 본을 보이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무엇보다 최고의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불신자들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개혁자들이 남긴 구호처럼 또 다시 교회개혁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다시 한 번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아니하는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강단 사역으로의 회복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강단이 성경으로 온통 뒤덮이지 아니하고서는 교회개혁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의 기준은 어느 특정인의 사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정확 무오한 성경뿐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자주 들어야만 바위도 뚫리게 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존 녹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줄 모르는 자들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강단에 우상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 까지 말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전파에 충실한 설교자들과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는 심령들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교회는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 예배의 단순화 개혁

예전과 예식이 신앙생활의 주를 이루었던 중세교회에서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이 되었다. 신부들도 예전이나 알고 성경에는 전적으로 무지하였다. 상당수의 신부들이 마치 복음서가 루터에 의해서 쓰여진 책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전 지키기에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로마교 신앙을 위한 변증자 니니안 윈게이트조차도 자신의 교구 성직자를 호되게 규탄하였다. 녹스 자신에 의해서 가해진 것 이상으로 강력하게 질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패한 삶을 비난한 것만이 아니라 예전행위들만 드높이는 무언의 교리들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침묵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였다.’ 무지와 무관심과 의식행위만이 존재하던 중세시대의 교회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단순화를 기하면서 신부들의 전횡을 막고 만인제사장직을 가르쳤다. 예전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예배의식은 인간이 고안해 낸 무엇으로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대로 해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것이 수동적인 의전 행사를 능동적인 예배 참여로 이어지게 하면서 신앙생활의 맛을 새롭게 경험하는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개혁교회는 특히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중심으로 주님의 보편적 교회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500년이 지난 지금의 개신교 교회들은 새로운 의전 중심의 예배로 전환되어가고 있다. 예배의 단순화에서 다양한 순서들이 삽입되어 상당히 의식화되어가고 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것이 되어 예배의 대상과 중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자들이 되었다. 이것 역시 시급하게 개혁되어야 할 과제이다.

예배갱신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갖은 조치들은 예배를 사람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우를 범하게 한 것이다. 입술로는 분명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일을 한다고 열심을 내지만 성경에 기록된 올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되지 못하여 사람들의 헌신적 열정을 높이 평가함으로 애써 하나님의 의를 무시해버리는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롬 10:2).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해야 할 신앙고백적 순종행위이다. 예배는 그 어떤 것도 교세 확장 혹은 부흥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 존속의 도구도 더더욱 아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직접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유지하시며 이루신다.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벗어던져야 한다. 예배는 예배자들을 흥겹게 하는 방편이 아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만이 피조물이 누릴 유일한 즐거움이다. 더구나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성삼위하나님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아니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들의 종교적 놀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우리의 자원하는 순종과 헌신을 낳는 신령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충실한 예배의 단순화로 변화될 때 가능할 것이다. 예배는 거듭난 백성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특권이요 영광이다. 예배는 회심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전도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다.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에 대한 영적 생명의 본능이다.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의무가 아니라 삶 자체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신앙고백이요 충성맹세이다.

이러한 예배가 지금은 종교의식으로 전락되었다. 하늘의 복을 받아내기 위한 흥정의 대상이 되었다. 예배자들의 입맛에 맞는 예배 골라가기가 만연되어버렸다. 인본주의 예배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예배시간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하나님이 규정하신 법도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은 족보 불분명한 것들은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의 의중은 안중에도 없다. 교회마다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이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되신 하나님과 같지 아니한 경우들이 속출하고 있다. 철저하게 예배의 규정직 원리에 따른 참된 예배여야 한다. 올바른 찬송이 드려져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부르라고 주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적이지 않은 가사들과 사람들 들으라고 쓰여진 내용들로 가득한 노래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권징회복

세 번째로 종교개혁은 사회 변혁으로 이끌었다. 제도개선과 개혁 및 의무교육 실천 및 권력의 이동까지 이끌어낸 엄청난 힘을 드러냈다. 교황권에서 국가만능주의로 옮겨간 측면이 강하였지만 그래도 절대군정을 강조하던 왕들조차도 교회의 영적 독립성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한 성도로서의 순종을 요구받았다. 성경이 시민들의 삶과 정부의 정치형태까지도 기초가 되어 민주정치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고 인간의 기본권의 회복과 직업의 귀천이 철폐되고 계급적 구조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 유럽의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교회 권징은 사랑가운데서 진리를 실현하는 방편이 되었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로 성결된 삶을 추구하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과 바르게 하는 권징은 장로회주의 정치에서 매우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성경의 절대권위에서 이탈하면서 성경의 교훈보다 철학과 과학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하늘의 것에 대한 관심에서 땅에 것에 대한 집착으로 뒤바뀌어 버린 현실을 환호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대접을 받고 있다. 권징은 말할 것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이권에 좌우되고 만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권징조례를 사문화시키지 아니하고 성경의 효능성인 ‘책망과 바르게 함’을 예외없이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누룩 없는 떡이어야 할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이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다’(고전 5:5).

더욱이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토록 항상 있는 말씀임을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절대 불변하시는 진리이시오 그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들이기 때문에 인본주의 사상에서 신본주의로, 과학맹신 사상에서 말씀 중심으로 전환해가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변혁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교회도 과학의 공헌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더 신뢰한다. 교회는 재물의 위력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불의의 재물로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는 방도는 세대의 흐름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존속하는 비결이다. 세상의 유행과 풍습에 민감한 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는 구별된 성도의 삶이 숭앙되고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라야 한다. 하늘나라 시민권자로서 말과 행실과 믿음과 사랑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는 성결된 삶의 회복은 끊임없는 말씀회복운동으로서만 성취될 것이다.

# 교회직제에 있어서 계급의식의 타파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낳은 열매 중 하나는 성직매매와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철폐된 것이었다. 교구교회의 요직은 고귀 성직자들과의 인척관계에 있는 자들이 차지하면서 무자격자들까지도 주교로 임명되는 작태가 빈번하던 중세시대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섬김을 받았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병폐들을 단번에 제거하고 성경에 준하는 자격있는 지도자들을 세우며 교회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개혁하였다. 또한 로마가톨릭의 성직자 계급직제에 관한 것도 다 폐지하면서 1560년 제 일 치리서나 1578년 제 이 치리서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교회 직분에 대한 성경적 규정을 명확하게 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장로 및 집사로 한정시켰다. 그리고 이 직분에는 계급적 차이가 아니라 기능적 구분만 있을 뿐임을 천명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교회 안에 모든 구성원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한다. 동일한 시민이요 하늘나라 권속인 것이다. 다만 주님의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던 종교개혁의 유산과 성경의 가르침이 한국의 교회들에서는 신종 성직 매매로 나타나고 있고 양 무리의 본이 되기보다 군림하는 모양새가 속출하고 있다. 은사에 따른 구분보다는 직제에 따른 특권층이 형성된 것이다. 서리집사에서 안수집사로 장로로 임직을 받으면서 한 단계씩 승계가 된다는 의식구조가 팽배해졌다. 더구나 교회 부동산 부풀리기의 한 일환으로 임직식을 통한 교회직분의 남발이 이어졌다. 결국은 교회의 순결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숨은 야욕이 돌출되어 교회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고 허세부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널려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먹혀들어가고 있어서 성직이라는 이름의 종교장사에 열을 내는 속물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교회의 직분은 주님의 몸을 온전히 세워가도록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받은 은사에 따라 직분자들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직임에 걸맞는 자인지 성경을 토대로 검증하여 주의 종으로서의 봉사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 교회 직분은 사회적 덕망이나 부의 유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규례에 따라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직분의 소중성과 존귀함을 회복해야 한다.

더구나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사업에 남다른 열의를 다하고 있다거나 혹은 교단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많다고 해서 존중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라야 한다. 그 진리의 빛을 찬란히 비추이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만이 실추된 교회의 영광과 말씀의 권위가 되찾아 질수 있다. 복지 사업이나 사회 기초질서 확립 혹은 윤리도덕 향상의 일들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교회의 기능은 구제와 봉사와 같은 일도 중요한 것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사업은 복음 전파이다. 복음 전파가 배제된 복지사업은 부패의 또 다른 온상이 될 수 있다.

지난 기독교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 그렇다고 운영자체가 힘겨울 정도가 되어서는 아니되겠지만 너무 많이 쌓아두어서 구린내가 나게 해서는 더욱 아니 된다. 재물은 영혼을 병들게 하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재정적 여유만만한 교회는 범사에 조심해야 한다. 교회라는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로 하여금 나눠주기를 좋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주일 회복과 절기 철폐

구약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외적 표시는 할례와 안식일이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요구한 이 표식은 신약시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즉 세례와 주일성수의 개념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의식이었다. 주일 혹은 일요일 개념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조선시대에 주일 혹은 일요일이 없었다. 그저 날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면서 주일 개념이 심어졌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목숨처럼 지켜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도들에게는 주일성수 개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해 졌다. 여전히 성경의 원리에 따라 회복되어야 할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가 지켜온 모든 기념일들과 절기들을 다 폐지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가 소위 성일 혹은 축일로 간주한 모든 날들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다 폐지시켰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기념하는 주일을 주의 날로 간주하고 공적으로 성도들이 모이는 신약의 안식일로 규정하였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의 날, 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은 것,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안식 후 첫 날에 모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서 주일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명절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일을 어떻게 성수할 것인가?

과거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질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예배 모범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일 성수의 기준을 소개함으로써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바를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이 주일성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사전에 준비하였던 그 원리대로 우리들도 모든 일손을 멈추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면서 주일에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시간을 가진다. 주님과 교통함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린다. 그 은혜를 성도들과 함께 나눈다. 성도들의 영적 교제의 풍성함을 누린다.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은혜의 감격을 나누도록 힘쓴다. 몸이 불편하여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그 은혜의 감동을 나눈다. 아이들에게 주일성수의 의무감을 어떻게 심어줄지 기도하면서 안식에 젖는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영적 교류는 거의 찾아지지 아니하고 대다수의 교인들은 예배 후에 사적 업무에 몰두하며 지낸다. 심지어 교역자들도 남아도는 오후 시간에 오락을 일삼거나 사적인 일들을 본다. 불필요하게 장을 보는 일이나 오락을 일삼는 일이나 여행을 떠나는 일들이 당연시되고 있다.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 아니라 여가선용의 날로 둔갑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주일성수가 주일 예배지킴으로 변질되었고 주일 예배 지킴도 이제는 매 주일이 아니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히 여겨야 할 시점까지 도달해 가고 있다. 반면에 교회의 여러 가지 업무에 시달리니라고 안식을 얻지 못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주일성수라고 보기 어렵다. 피곤만 육신 때문에 예배조차도 형식으로 흘러가고 단지 일 때문에 교회당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다. 그들 역시 영적으로 돌봄이 필요하다. 그들 역시 목양의 대상이기 때문에 목사는 성도 각각의 심령 상태를 살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서로 돌아보는 일도 주님을 섬기는 영적인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의 일은 즐겁고 기쁜 것이지 짜증낼만한 것이 아니다. 안식은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얻은 선물이다. 주일에도 혹 나의 희생과 수고가 요구되는 것이라면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영적 안식을 즐기게 하는 성스러운 봉사라고 간주하라. 그것이 우리의 안식을 더욱 즐거운 날로 여기는 길이 된다.
 
이제 예배 모범에 기록하고 있는 주일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것인지를 살펴보자: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옯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 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서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이렇게 예배 모범에서도 규정하고 있듯이 공 예배 외에도 안식일에 할 일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한 그러한 안식의 즐거움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꿀맛이다. 아내의 수고로 식구들이 건강함을 유지하게 되듯이 우리의 희생과 봉사로 많은 성도들이 즐거움을 얻는다면 감사함으로 감당할 일이다. 허나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안락과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예배는 성도로서 지켜야 할 하나의 요식행위로 간주하고 남은 시간들은 모조리 다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한 것으로 할애하며 산다. 세속적인 것을 더 얻기 위한 여가활용으로 이용한다. 그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라면 예배 참여도 종종 건너 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안식하는 자들은 비록 소수 같아도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오늘날 번져가고 있는 사이버 교회 혹은 인터넷 예배나 티브이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성경적 교회관에서 보면 그 모든 행위들은 옳은 것이 아니다. 예배 의식 참여 자체가 주일 성수의 전부가 아니다. 또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지체는 반드시 몸에 붙어 있어야 자기 역할 수행이 가능한 모든 양분을 공급받으며 활동할 수 있다. 성도 한 사람을 가리켜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자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고 상호 교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교회나 인터넷 예배 참여 문제들은 성도의 교통이 무시되고 개인의 종교의식행위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성전)를 세워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지교회를 섬기며 그 안에서 주님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반드시 지역교회에 속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동역자여야 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논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열심을 구실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떠한 행함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가납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만인들의 골수에 스며들어 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잘못된 확신에 근거한 예배가 편만해 있는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소위 “제 멋대로의 예배”는 전적으로 헛된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기뻐하신 것에 주목하는 대신 자기들 기분에 맞는 방법으로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예배의식이 주일성수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생각과 상황이 더 지배적인 동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는 것은 옛적 길로 돌아가야 함을 더욱 강조하고 성경의 교훈을 가감 없이 증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개인의 자유함을 박탈하는 억압이라고 비난할지 몰라도 주님은 기뻐하시는 일이다.

지난 10월 18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주일은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가게를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즉 ‘칙필라(Chick-fil-A)’라는 미국의 치킨 패스드푸드 업체가 있다. 40여개 주에 1800개의 매장을 운영하면서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치킨 너겟을 판다. 칙필라는 주일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난해 매출은 50억 달러(한화 5조 2225억)를 기록, KFC를 누르고 업계 1위로 등극했다.

지난달 8일 93세로 별세한 창업주 새뮤얼 트루엣 케이시는 창립 때부터 주일휴무 원칙을 지켰다. 침례 교인이었던 그는 신앙을 사업에 접목하려고 애썼다. 그는 평소에 식당 운영자와 종업원들에게 “닭고기 파는 사람 이상이 돼야 한다. 고객들의 삶의 일부로 살아야 하고,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 이 지역사회의 일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주일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였다. 그는 주일휴무를 “사업가로서 내린 최고의 선택이었다”면서 “(주일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요한 간증”이라고 묘사했다. 이 외에도 에릭 리들과 같은 성도들의 주일성수의 이야기들, 일제 시대에 주일을 지키며 순교를 당하거나 핍박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우리는 주일 성수 운동을 다시 벌여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세움을 받아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가 지키고 있는 삼대절기문제도 이참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이 과연 성경에 기초한 것인가? 한국교회가 좋은 의미에서 지키고 있는 절기라고 할지라도 유익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지고 엉뚱하게도 산타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둔갑하였다. 예수님의 탄생의 참된 의미보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더 선명하게 각색되어 구제하는 일에 집중하거나 지극히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는 날로 전락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에 뒤질세라 부지런히 불우이웃 돕기에 나선다. 그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실지로 예수님의 생신은 제자들이 가장 잘 축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복음서 어디에도 스승의 생신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일이 없었다. 거꾸로 예수님이 제자들 생일잔치 차려준 것도 없었다. 부활절은 어떤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여 모이는 날이 주일이다.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킨 적이 없다. 개혁자들은 매 주일이 성탄절이요 매 주일에 부활절이요 매 주일이 감사주일이었다. 불필요한 시간과 재물 낭비를 가져올 뿐이다. 물론 교회 재정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절기가 부족한 재정 충당을 위한 수단은 아니잖은가?

# 개혁교회의 연합: 주님의 보편적 교회 세우기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의 교회개혁 운동은 독자적인 행보들을 보인 것 같아도 서로 긴밀한 협력가운데서 개혁의 확산을 꾀하였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자들이 각기 고국으로 돌아가 개혁의 불길을 지펴나갔다. 그리하여 형태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신학적 기조와 예배의식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그들은 칼빈의 교회, 쯔빙글리의 교회, 녹스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몸부림친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특별히 신약성경에 근거한 성경적인 교회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와 같은 일을 위하여 서로 긴밀한 서신교환이 엄청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개혁파 교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교파간의 분열과 나누어지는 불행의 역사가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그 각축장의 한 사례가 되어버렸다. 장로교라는 간판을 단 교단만도 100개가 훨씬 넘고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다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삼는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진보주의적 색체를 띠는 교단의 교회활동을 거침없이 수행하면서도 개혁교회라고 주창한다. 정말 혼돈의 시대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미 지적한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전하고 있는(고후 2:17) 현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자들은 배척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이제라도 같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개혁신학과 신앙을 고백하는 개혁파 교회들의 상호협력이 절실하다. 주님의 보편적 교회관 확립을 위한 수고의 땀이 필요하다. 비성경적이고 탈신학적인 사고로 일관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행태를 그러려니 하며 방치하고 우리들만의 집을 잘 수성하자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된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기 피할(PR) 시대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작은 개혁교회들도 자기들만의 SNS활동을 하면서 교회 알리기에 힘을 쓴다.
 
그에 비해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갈망하며 힘을 쏟았던 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는 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고 해도 맘에 맞는 소수의 사람들만의 교제가 전부이다. 시대적 풍토가 그래서 인지 몰라도 이제는 하나된 주님의 교회를 같은 신학과 신앙을 전하는 교회만이라도 독립교회들처럼 활동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연합을 통해서 개혁교회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거짓된 복음을 참된 것으로 알고 종교생활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자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욱 저돌적으로 알게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일을 위해서 순수한 개혁파 교회의 영적 연합을 위한 순수한 기도회와 사경회와 같은 시간들을 함께 가지는 일련의 활동들이 요망된다. 18세기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에서는 필립 도드리지와 같은 비국교도들이 매월 정기 기도회를 가지면서 비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일들을 함께 꾀하였음을 볼 수 있다. 교통수단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너무나도 분주하기에 이를데없지만 주님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수고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현재 개혁파 청소년 연합집회나 사경회가 미국은 가능한데 우리는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리더십 문제에 있다고 보지만 협력하고자 하는 마음 부재가 제일 큰 장벽이다. 나 혼자도 벅찬데 무슨 연합활동이냐며 은둔주의자가 아닌 은둔생활을 즐기려고 한다. 우리도 뭉치면 분명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개혁파 교회의 연합이라는 큰 그림이 한국 사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강의를 마무리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남겨준 좋은 유산들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올바른 말씀선포 사역의 회복과 예배의 단순화, 정당한 권징 회복, 교회내의 성직매매와 계급화 타파 그리고 주일성수는 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남겨준 훌륭한 유산들이었다. 그리고 개혁파 교회들의 연합활동에 힘을 모아야 한다. 교단정치하자는 것이 아니다.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이며 탈신학적인 일들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에게 조국 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개혁이 되어야 할 대상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특별히 마무리하면서 개혁교회의 예배와 관련하여 개혁교회 성도들이 안심하고 함께 부를 수 있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시편찬송과 성경적인 훌륭한 찬송시를 담은 찬송가집이 반드시 출판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다. 이 일을 위하여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에서 계획을 세워 진행시켜 가고 있는데 이 일에 여러분들의 기도와 재정적 헌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특색을 예배 특히 찬송과 설교에서 분명하게 두드러진 보편적 교회 세움에서 드러나야 한다. 신학적 이해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목회현장에서 실행 가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대한민국 땅에서 다시 한 번 복음의 위력이 강타함을 보고 싶다. 그러한 일군들을 세워주시기를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마친다.

* 기사의 원활한 제공을 위해 각주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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