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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학

[원문] 스코틀란드 교회 '제2치리서'에 나타난 장로교회 모습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6:37

이승구 교수(합신대, 조직신학) / 2014년 11월 3일 기사

 

* 하단의 내용은 언약교회(담임:박주동 목사)가 지난 11월 1일부터 2일까지 진행한 ‘종교개혁 기념강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주최 측이 발표문을 제공해 원문으로 서비스하지만 모든 저작권은 제공 단체(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무단전제 및 불법적인 도용은 추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는 만큼 주의를 당부합니다.

 스코틀란드 교회의 <제 2 치리서>(1578)에 나타난  장로교회의 모습
/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I. 들어가는 말: <제 2 치리서>(1578)와 안드류 멜빌

   
▲ 이승구 교수(합신대, 조직신학)
요한 낙스(John Knox, 1514?-1572) 사후에 스코틀란드 교회의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고 흔히 “장로교주의의 아버지”(the father of Presbyterianism)이라고 불리는 안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의 주도하에 작성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가 멜빌이 총회의 의장(moderator)으로 수고했던 1578년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 총회에서 받아들여짐으로 스코틀란드에 철저한 장로교 조직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안드류 멜빌은 앙구스의 몬트로즈(Montrose, Angus)에 가까운 발도비(Baldovie)에서 리쳐드 멜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리쳐드 멜빌은 핑키 전투(the Battle of Pinkie, 1547)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곧 돌아 가셔서 안드류 멜빌은 23년 연상의 큰 형인 리쳐드 멜빌(1522–1575)에 의해 키워졌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고 큰 형은 그를 교육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그는 몬트로즈 문법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공부하는 일에 토대를 마련했고, 그 후에는 2년 동안 (던의 존 얼스킨[John Erskine of Dun, 1509–159)]이 몬트로즈에 있도록 설득하여 그곳에 있던) 삐에르 드 마르세이유(Pierre de Marsilliers)에게서 희랍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세인트 안드류스 대학교에 진학하여 뛰어난 희랍어 실력을 드러내면서 “(그 땅의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시인이요 철학자요 희랍어 전문가”(the best poet, philosopher, and Grecian of any young master in the land)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학교를 마쳤다고 한다.

안드류 멜빌이 19세 되던 해인 1564년 프랑스로 가서 빠리 대학교에서 셈어 연구에 힘을 쏟아 탁월한 동양어 학자로 인정받고 동시에 아드리아누스 투르네부스(Adrianus Turnebus)에게서 희랍어를 더 배우고, 피터 라무스(Petrus Ramus)의 강의를 듣고, 뽀아띠에(Poitiers)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1566), 21살의 나이에 성 마르세온 학교(the college of St Marceon)의 교장으로 임명 되었다. 3년을 가르친 후에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개신교 지역인 스위스의 제네바로 가서 떼오드르 베자의 환영을 받으면서 제네바 아카데미의 인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 가르치면서도 그는 동양어 연구의 힘을 써서 동료 교수인 코넬리우스 베트람 교수(Cornelius Bertram)에게서 시리아어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제네바에서 가르칠 때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바돌로뮤 대학살 사건(1572)으로 수많은 프랑스 개신교 지식인들이 제네바로 유입되어 그들과 교제하면서 다방면의 지식이 더 깊어지고 특히 교화의 자유에 대한 의식이 더 강화 되었다고들 평가한다.

1574년 스코틀란드로 돌아 온 안드루 멜빌은 글라스고우 대학교 학장(Principal)으로 세워져 이 대학교를 새롭게 하는 일을 한다. 좋은 제도를 만들고 공고히 하여 교과과정을 확대하고, 언어와 자연 과학과 철학과 신학 교수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일으로 그는 유명해져서 1575년에는 아버딘 대학교를 새롭게 하는 일도 돕게 된다. 그리고 교회를 새롭게 하도록 <제 2 치리서>를 작성하고, 1578년 총회장으로 섬기던 때에 이 <제 2 치리서>가 스코틀란드 교회 총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제 2 치리서>에서는, 우리가 후에 논의할 바와 같이, 목사와 감독은 같은 직분임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스코틀란드 전국의 교회가 장로교적 체제를 갖추게 규정했다. 그러나 그것의 실행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었으니, 앤드류 멜빌이 세인트 안드류스 대학교의 신학부인 St. Mary's College의 학장(Principal)으로 임명된 1580년 이후에 이르러서야 <제 1 치리서>에서 임시로 감독자들(superintendents)에게 위임했던 행정적 권세를 노회(presbyteries)와 교회 법정(ecclesiastical courts)에로 이관하게 되었다. <제 2 치리서>에서는 주교제도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모든 목사의 동등성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이는 당시에 왕실이 주교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하던 것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제 2 치리서>에서 노회(presbytery)가 명확한 교회 제도로 드러나게 되었고, 노회가 하나님의 법을 따른 것임이 분명히 선언되었다(jure divino theory). 비로소 이때에 이르러서야 처음 개혁자들의 본래적 의도에 일치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온전한 장로교 제도가 나타난 것은 1581년에 이르러서이지만, 그것은 이미 1560년에 공식적으로 선언된 시작된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더글라스의 말에 우리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치리서>에서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모든 회원은 국가의 종교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의 평등성은 정치적 사회적 평등성보다 훨씬 더 먼저 선언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왕과 귀족들이 있는 정황에서도 교회에서는 모든 진정한 신자들의 동등한 지위와 결정권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후로 스코틀란드의 교회와 학교를 개혁하여 스코틀란드 전체를 개혁하는 일은 순조로운 일을 아니었다. 왕실은 주교제도를 회복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서 싸우는 일은 항상 어려운 일 이었다. 그 과정에서 안드류 멜빌은 계속해서 주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고 하는 로버트 몽고메리(Robert Montgomery, d. 1609) 주교를 치리하였고, 이 일로 멜빌 자신이 1584년 2월에 추밀원(privy council)에 불려가 심문을 받아야 했으며 반역 죄로 처벌되지 않기 위해 영국으로 도망가야 하기도 했다. 1585년 11월에 다시 스코틀란드로 돌아 온 멜빌은 1586년 3월부터 센인트 안드류스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여 20년을 더 가르쳤으면 1590년에는 세인트 안드류스 대학교의 총장(Rector)이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교회의 자유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은 희생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제임스 6세 (후일 영국과 스코틀란드 통합 왕국의 제임스 1세)에게 했다는 다음 같은 말은 이런 그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폐하, 폐하 자신도 하나님의 어리석은 종(God's silly vassal)이일 뿐입니다. 스코틀란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즉, 국가의 머리(the head of the commonwealth)이신 제임스 왕이 있고,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제임스 6세도 그리스도에게 복속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왕국에서는 제임스 6세도 왕도 아니요, 주도 아니요, 머리도 아니요, 한 지체일 뿐입니다.

매우 당연한 말지만 1570-90년대에 이런 말이 왕에게 어떻게 들렸겠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매우 놀랍고 혁명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660년 왕권이 회복(Restoration)된 후에는 감독제냐 노회 제도냐의 문제가 다시 논쟁의 핵심이 되었고, 17세기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은 낙스 등이 가르친 성경적 개혁파 사상에 충실하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노력했다.

이 글에서는 제 2 치리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과연 1577년대 스코틀란드 장로교인들은 성경적인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II. <제 2 치리서>의 내용과 특성

9항목(Head)으로 나뉘어 제시되어 있던 <제 1치리서>(1560)와는 달리 <제 2치리서>는 13장으로 되어 있다. 그 장을 그대로 따라 가면서 1577년의 스코틀란드 성도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제 1 장: 교회와 그 정치체제(政體) 일반과 시민 정치 체제와의 차이에 대해서
(Of the Kirk and Policy Thereof in General, and Wherein it is Different from
the Civil Policy)

“하나님의 교회(the kirk of God)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로 여겨진다”고 시작하는 제 2치리서는 그 바로 뒤에 다음 같은 현실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경건한 자들의 집단과 그런 자들만의 교제(company and fellowship)가 아니고, 외적으로는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위선자들도 포함하는 공동체이다”(I. 1). 이는 교회(kirk)가 건물이 아니라,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매우 바르고 성격적인 이해를 잘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는 경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항상 위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현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한 사람들만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던 도나티스트 이단을 배제하고,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참 신자와 가라지가 같이 섞여 있는 복합적인 공동체라는 어거스틴적인 이해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바로 뒤에 “때로는 교회가 경건한자들 선택된 자들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붙이고 있는 데, 그것은 소위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不可視的 敎會, invisible church)에 대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뒤에 “때로는 진리를 고백하는 회중 가운데서 영적인 치리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교회에 말하고”를 그렇게 이해하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의미에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특정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a certain power granted by God), 그 권세에 따라 전체 교회의 위로를 위하여 사용하는 정당한 통치권(a proper jurisdiction and government)을 사용한다고 말한다(1. 2). 교회의 권세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다시 부연하고 있으니, “교회적 권세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께서, 모여진 그의 교회에 주신 권위인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가진 것이다.” 이 얼마나 명백하며 귀중한 진리의 천명인가?

그러므로 제 2치리서는 (1) 교회라는 용어의 삼중적 용례를 잘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에 건물을 지칭하는 용례는 적어도 이 앞부분에서는 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2)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그 통치권의 행사는 전체 교회의 위로를 위해(to the comfort of the whole kirk) 사용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위로를 주지 않는 치리의 시행은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천주교나 주교제 아래서 교권의 행사를 통해 교회가 위로를 받지 목하고 폭정 아래 있었던 경험을 잘 상기시키는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3) 근본적으로 모여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이 교회적 권위는 그저 회중 전체가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 부르심에 의하여 교회의 영적 통치가 그들에게 맡겨진 분들에” 의해서 시행된다는 것도 명백히 한다(1. 2).

이를 좀 더 구체화 하면서 “이 권세에서 나오는 교회의 정치 체제(政體, policy)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 일에로 선정된 지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영적 통치의 형태이다”(an order or form of spiritual government which is exercised by the members appointed thereto by the word of God)(1. 3, 강조점은 덧 분인 것임). 그러므로 위에서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의 한 측면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그 직무를 담당하도록 세워진 것을 더 분명히 하며, 그 뒤에는 직무를 맡은 이들(the office-bearers)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이 권세가 직접적으로 주어진다(is given immediately)는 표현도 한다(1. 3). 이처럼 제2치리서는 교회의 권세와 정체가 그것의 유일한 토대인(the only ground thereof)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근거해야만 한다는(should lean upon) 것을 강조하면서, 따라서 그 정체가 성경의 순수한 원천(the pure fountains of the scriptures)으로부터만 취해져야 한다고 말한다(1. 7).

그런데 그 권세의 사용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밝힌다. 주로는 교사들, 즉 목사님들에 의해서 사용되는데 이를 일반적 권세(potestas ordinis)라고 부르고, 때로는 다른 직임자들, 즉 장로들과의 상호협의를 통해서 함께(conjunctly by mutual consent of them) 행사 되는 것을 재판권(potestas jurisdictioni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종류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위, 하나의 근거, 하나의 종국적 원인”(one authority, one ground, one final cause)을 가지는 것으로, 시행 방식에 있어서만 다르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서 우리 주님이 이를 언급하셨음을 밝힌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제임스 커크는 이에 대해서 다음 같은 설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권세인 일반적 권세(potestas ordinis)와 교회적 치리를 시행하는 권세(potestas jurisdictionis)의 구별은 전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의는 일반적 권세(potestas ordinis)는 목사님들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합법적으로 시행될 수 있으나, 재판권(potestas jurisdictionis)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하에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로 구성된 장로의 회(the eldership)로 이하에 규정된 교회적 재판정(an ecclesiastical court)에 의해 집단적으로 시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에 천주교회나 주교제 아래서 개개인 주교에 의해서 시행되던 권세가 특히 재판 문제에 있어서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로 이루어진 집합적인 교회 법원(an ecclesiastical court)에 의해 시행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된 것이다. 이를 따르려면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얼마나 잘 준비된 분들이어야 하며, 얼마나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 권세와 정치 체제는 국가의 통치를 위한 시민적 정치 체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에로 나아간다(1. 4). 이 당시의 국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도 교회의 정치 체제와 국가의 정치 체제가 다르다고 천명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 이 둘이 공동의 목적으로 위하므로 실질적으로 긴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소위 에라스티우스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실질적으로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에라스티우스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가르쳐진 가르침을 국가나 이 사회 일반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조금만 바꾸어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기독교 좌파에서나 기독교 우파에서 시도된다. 이 모든 것이 다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해야 한다.)
 
이는 특히 당시 상황 속에서도 교회의 목사들이나 다른 직임자들이 세속 통치자들에게 복속하듯이, 세속 통치자들도 영적으로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에 복속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1. 9). 교회적 문제의 통치권은 세속 군주가 아니라 독립된 교회에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하여 에리스티우스주의의 근거가 있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세속 군주는 칼은 가졌으나 교회는 [천국] 열쇠의 직무(the office of the keys)를 가졌다고 단언하는 것이다(1. 9). 이는 제 1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요점이기도 한다. “군주들도 그들이 양심과 종교 문제에 있어서 범과했을 때는 교회의 치리에 복속해야만 한다.” 결론의 말에도 이는 다시 한 번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 국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인정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의 국가가 과연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 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 국가도 교회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2) 그 국가의 목적도 역시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시키고 (즉, 온전하고 바르게 인정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이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자들도 “교회의 통치를 돕고, 유지하며, 강화하려고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3) 기독교 통치자는 공의를 시행하고 악을 벌하며 자신의 통치 영역 안에서 교회의 자유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한다(1. 10).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와 교회는 그 성질이 다르고, 따라서 그 통치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는 외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하지만, 교회의 통치는 순전히 영적이다(1. 5). “세속 통치자들은 그 백성들 사이의 외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외적인 것들을 명령하지만, 목사님들은 외적인 것들은 양심의 문제로만 다룬다.” 또한 “세속 통치자들은 외적인 것만을 다루고 사람들 앞에서 행한 행동만을 다루지만, 영적인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양심과 관련하여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도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세속 통치자들은 칼과 외적인 수단에 의해서 순종을 요구하고 순종을 얻을 수 있지만,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검과 영적인 방식으로 그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고, 그리스도를 그 중보자와 머리로 하며, 따라서 이 땅의 그 어떤 세속적 머리를 가지지 않는다(1. 5). 제 2치리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라는 것을 여러 다른 단어로 강조한다: “교회의 유일한 왕이요 통치자”(the only spiritual King and Governor of his kirk, 1. 5);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군주”(the only Head and Monarch of the kirk, 1. 6); “유일한 영적인 왕”(the only spiritual King, 1. 7); “교회의 영적 정부의 주님”(Lord and Master in the spiritual government of the kirk, 1. 8); “교회의 한 머리요 주된 통치자”(one Head and Chief Governor, 2. 1), “교회의 유일하신 왕, 대제사장, 교회의 머리”(the only King, High Priest, and Head thereof, 2. 3). 그러므로 천사나 사람을 막론하고 교회의 머리[首長]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리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그 고귀한 용어를 찬탈하여 사용하는 것이라고 밝힌다(1. 6). 보편의 교회와 특정한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명령하고 통치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별하고 고유한 직임(Christ's proper offic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치를 사람의 섬김을 사용하여(by the ministry of men) 하시는 것이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직임을 맡은 자들은 주관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 안에서 주라고 불려서도 안 되고(nor be called lords), 오직 섬기는 자들, 제자들, 그리고 종들이라고 불려야만 한다고 단언한다(1. 8).

16세기 맥락에서 주교들이 세상 통치자들과 같이 “lords”라고 불리던 맥락에서 이는 매우 강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교회 공동체의 직임자들이(office-bearers) 다른 교우들과 동일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면서, 동시에 섬기는 자들(ministers, servants)임을 아주 강하게 단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님들은 세속적 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단지 세속 통치자들에게 어떻게 말씀에 따라 그 통치권을 사용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 때 자신들을 세속적인 일에 지나치게 결부시켜서 자신들의 독특한 책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강조한다(1. 15).

2. 제 2 장: 교회의 정체와 직임들에 대해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다스리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가장 필요한 수단으로(as a most necessary middis [means] for this purpose, 2. 3) 사람의 사역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천명한다(1.1 그리고 1. 3).

그리고 교회의 정체가 교리(doctrine), 치리(discipline), 나눔(distribution)에 있다고 규정하고, 이에 따라 교회에는 교리를 가르치고 성례를 섬기는 설교자(목사), 치리를 하는 통치자(장로), 그리고 나누어 주는 자들, 즉 집사들(distributors, deacons)의 세 직분이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다(2. 2. 그리고 2. 5). 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ministers of the kirk)라고 하여(2. 3)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한 표현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 성령의 은사가 부여된 사람들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2. 4), 그러나 독재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기능을 따라 섬기는 동등한 권세를 지닌 형제들의 삼호 협의에 의해 다스리도록(they should rule with mutual consent of brethren, and equality of power, every one according to their functions)하셨다고 선언한다(2. 4).

신약 시대에 세워진 직분 가운데 비상한(非常) 직임이 셋 있었으니 그것은 사도들의 직임, 복음전하는 자들의 직임, 그리고 선지자들의 직임이다. 이 직임들은 영구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그쳐졌다(2. 6). 교회 공동체 안의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직임들은 목사, 즉 감독의 직임, 교사의 직임, 장로의 직임, 그리고 집사의 직임이다(2. 6). “이 직임들은 평상적(ordinary) 직임들이고 교회 안에 계속해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교회의 통치와 정체의 필수적인 직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수립된 참된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른 직분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2. 7) “그러므로 이 네 종류의 직분이 아니고 적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창안된 모든 높은 호칭들과 잘못 사용된 위계질서 안에 있는 직임들은 그에 부속하는 다른 직임들과 함께, 한마디로, 거부되어져야만 한다”(2. 8). 이처럼 제 2치리서는 칼빈과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해서 오직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목사, 박사(교사), 장로, 집사의 직임만이 교회에 영구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3. 제 3 장: 교회적 직임을 얻고, 받아들여지는 방법에 대하여

자격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교회 안에서 직임을 얻게 되는 합법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부르심(vocation or calling)이라고 한다(3. 1). 이를 또 강조하면서 “합법적인 부르심이 없이 교회적 직임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 1). 그런데 사도와 선지자를 부르실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시는 비상한 부르심(extraordinary)은 ”이미 세워지고, 이미 잘 개혁된 교회들에서는 있지 아니하다“(kirks established, and already well-reformed, has no place)(3. 2). 이제 우리들의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평상적 부르심(혹 일반적 부르심, ordinary calling)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한 양심의 내면적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수립된 질서에 따라 합법적인 시험을 통한 받아들임(the lawful approbation)과 사람들의 외적 판단을 따라 확인하는 것이다(3. 3).

이 평상적 부르심은 선택(혹 선출, election)과 임직(ordination)으로 이루어진다(3. 4). 선택은 공석이 생긴 직임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사람이나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인데 이는 장로들의 판단과 그 직임을 담당할 회중들의 동의(consent)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3. 4). 그 자격들은 성경에 충분히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종교(즉 교리의) 건전함과 사람의 경건이다(3. 4). 그러므로 회중의 뜻에 반하여 선택이 이루어지거나 장로들의 가르침이 없이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3. 5). 또한 특히 목사의 경우를 염두에 두면서 이미 다른 이가 합법적으로 세워져 있거나 공석이 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끼어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목사들은 어떤 다른 목적으로 헛되게 이 직임을 담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3.7). 그러면서 목사의 사례는 합법적으로 부름 받고 선택된 목사들의 사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3. 5).

이 직임자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그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회중이 있어야 한다(their own particular flocks amongst whom they exercise their charge)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3. 8).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 부르심[즉, 직임]에 따라 그들을 살피고 돌아보아야(take the inspection and oversight of them) 한다는 것이다(3. 8) 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세움[건덕]이라는 두 가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3. 8).
합법적으로 부름 받고 선택된 사람을 잘 시험하여 자격이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나면 그 사람을 하나님과 교회에 의하여 세워진 사람으로 구별하고 성별하는(the separation and sanctifying of the person appointed of God and his kirk)는 것이 임직식(ordination)이다(3. 6). 임직식은 금식과 엄숙한 기도와 장로들의 손을 얹는 것으로 이루어진다(The ceremonies of ordination are fasting, earnest prayer, and imposition of hands of the eldership)(3. 6).

이 점이 <제 1 치리서>와 달라진 부분인데 <제 1 치리서>에서는 “사도들은 손을 얹음[按手]을 사용했으나 [이에 따르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이 임하는] 이적이 그쳐진 것을 볼 때에 이런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albeit the apostles used the imposition of hands, yet seeing the miracle is ceased, the using of the ceremony we judge is not necessary)고 명확히 하면서, 한 동안 임직식에서 안수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엄숙히 기도하여 그 일에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기도만 하여 직분자들로 세웠었다. 이와 같이 하여 안수와 관련된 천주교회의 미신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이로부터 17-18년 지난 1578년에는 이런 미신이 충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장로들의 손을 얹는 일이 임직식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후로 장로교회에서는 임직식에서 안수의 사용을 선택(optional) 사항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4. 제 4 장: 목사직에 대해서

제 2치리서는 목회자(pastors), 감독들(bishops), 목사들(ministers)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이 직무는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리며 그들을 돌아보도록(지켜보도록) 어떤 특별한 회중에게 세워진 직무라고 하고 있다(4. 1). 이들은 회중을 말씀으로 먹이는 것이므로 때로는 목회자들(pastors, 목자들)이라고 하고, 그 양무리를 돌아보므로 감독들(episcopi 또는 bishops)이라고 하며, 그들의 섬김과 직임 때문에 섬기는 이들(ministers)이라고 하고,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하는 영적 다스림의 엄위성 때문에 장로들(presbyters, seniors)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목사들은 그들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는 특정한 회중에 없이는 선출되어서는 안 되고, 사역에로 불려서는 안 된다(4. 2)는 것과 그 누구도 합법적인 부르심이 없이는 이런 직무를 감당하려고 해서는(즉 이 직무를 찬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4. 3) 다시 강조한다.
 
그리고 한번 하나님에 의해서 불리고 백성들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그들이 사역을(the charge of the ministry) 수납하고 나서는 그 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다고 하고,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 직무를 버린 사람들(deserters)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도록 권면 받아야 하고, 그리하지 않을 때는 출교되어야(excommunicated)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4. 4). 이어서 그 어떤 목사도 자신이 담당한 특정한 회중을 지방회나 총회의 허락 없이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할 때에는 권면해야 하고, 그것도 듣지 않을 때에는 교회의 치리가 그에게 임하게 된다고 선언한다(4. 5).

오직 목사들에게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침(teaching of the word of God)과 성례를 집례 하는 것(th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이 속한다(appertains)(4. 6, 7). 같은 이유에서 그 특정한 회중을 위해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도 목사에게만 속한다고 선언한다(4. 8). 목사들은 또한 그 회중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고, 교리를 그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apply the doctrine to them) 한다(4. 9). 따라서 교회에게 부여된 [천국] 열쇠의 권한(the power of the keys granted unto the kirk)에 따라서 장로회와의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서(after lawful proceeding by the eldership) 사람들에 대해서 맺고 푸는 선언을 하는 것도 목사에게 속한다(4. 10). 마찬가지로 장로회와의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서(after lawful proceeding by the eldership) 혼인식을 엄숙히 집례하고(solemnize marriage),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거룩한 연합에로 들어가는 부분에게 주의 복을(the blessing of the Lord) 선언하는 것도 목사에게 속한다(4. 11). 또한 일반적으로 교회의 문제에 관하여 회중 앞에서 하는 모든 공적인 선언은 목사의 직무에 속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메신저(messenger)요 하나님의 뜻의 공포자(herald)이기 때문이다(4. 12).

5. 제5장: 교회의 박사, 즉 교사직, 그리고 학교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또 다른 평상적(일반적)이고 연속적인 직임은 (교회의) 박사라는 직임(the office of the doctor)이다. 이는 선지자, 감독, 장로, 또는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자(prophet, bishop, elder, catechiser)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말한다(5. 1). 이 때 이를 선지자라고 언급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 초기의 선지자들과의 혼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현명한 단어의 선택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특히 비상직원들 가운데 선지자를 언급했었으므로(2. 6) 그것과 다른 평상직원들 가운데 교회의 박사를 선지자로 언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박사의 직임은 목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 때 성례의 집행이나 그와 연관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다), 단순히 사람들에게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뜻을 잘 열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목적은 신실한 자들이 건전한 교훈(sound doctrine)으로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것이고, 특히 무지나 악한 의견들에 의해서 복음의 순수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5. 2). 그는 목회자와는 이름만이 아니라 은사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니, (교회의) 박사에게는 단순한 가르침에 의해서 신앙의 신비들을 열어주는 지식의 말씀이 은사로 있다면, 목회자들에게는 상황에 따라 말씀을 회중의 삶의 방식에 적용하여 권면하는 지혜의 은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5. 3). 그러므로 회중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 하는 것과 혼인식을 집례 하는 것 등은 특별히 그 일에로 또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지 않고서는(unless he is otherwise orderly called) (교회의) 박사의 직무에 속하지 않는다(5. 6). 그러나 폴리캅이나 다른 사람들의 예들에서 증언하는 것 과 같이 목사에게 은사가 있으면 목사가 학교에서 가르칠 수는 있는 것이다(5. 6).

또한 박사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지어 이교 나라들에서도 때때로 잘 유지되어 온 학교들과 대학들에서의 직임자들(the order in schools, colleges, and universities)을 뜻하기도 한다(5. 4). (교회의) 박사는 장로이므로,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목사를 보좌해야만 하며, 모든 회의체에서 형제된 다른 장로들과 협의해야 만하니(concur with the elders, his brethren, in all assemblies), 교회 문제에 있어서 유일한 판단자(judge)인 말씀의 해석이 그들의 직무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5. 5).

6. 제 6장: 장로들(elders)과 그들의 직임(Office)에 대하여

성경에서 장로라는 용어는 때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임을 뜻하기도 한다는 말로써 장로에 대한 규정을 시작하고 있다(6. 1). 직임으로 이 용어가 사용 될 때는 목사들과 박사들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6. 1). 그러나 이 장에서 장로라고 할 때는 사도들이 다스리는 자들(presidents or governors)이라고 부른 직임을 지칭하는 것이다(6. 2). 이 직임도 평상적(일반적, ordinary)이며,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하는 영구적인(perpetual) 것이고[그런 의미에서 항존직], 교회에 항상 필수적인(necessary) 것이다(6. 2) 또한 장로직도 목사의 사역(ministry)과 같이 영적인 직임(spiritual function)이다(6. 2). 장로들은 한번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고, 그 직임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이 직임을 떠날 수 없다(6. 2). 구약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일단의 장로님들이 돌아가면서 시무를 쉴 수는 있다. 회중 안에서 시무하는 장로의 수를 결정해야 한다. 한 회중에서의 장로의 수는 제한될 수 없고, 회중의 크기와 필요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6. 2).

장로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가는 성경의 표현, 즉 사도 바울이 제시한 규정들(canons written by the apostle Paul)을 참조하라고 한다(6. 3). 그들의 직무는 그들에게 맡겨진 회중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부지런히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리와 생활 방식의 그 어떤 부패도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6. 4). 목사들과 박사들이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여 부지런히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장로들은 백성들에게서 그 말씀의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만 하는 것이다(6. 5). 장로들에게는 백성들이 주의 상[성찬상]에 올 때에 그들을 점검하는 일에서 목사를 돕는 일이 속해 있다. 예를 들어서, 병자들을 심방하는 일과 같은 일이 속해 있는 것이다(6. 6). 또한 장로들은 지방회와 총회의 일들이 잘 수행되도록 해야 한다(6. 7). 또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규례에 따라서 그 의무를 다하게 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6. 8). 개인적인 권면에 의해서 고쳐지지 않는 일들은 장로들의 회에 가져 와야 한다(6.8). 그들의 주된 임무는 교회 안에 선한 질서를 수립하고 치리를 수행하기 위해 목사들과 박사들과 함께 회의체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hold assemblies with the pastors and doctors)이다(6. 9).

다음 장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장로들의 사역은 결국 회의체를 통하여 집합적이고 공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장로교회의 분명한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7. 제 7장: 장로들의 모임, 회의체들, 그리고 치리에 관하여

장로들의 모임(eldership or assemblies)은 목사들과 박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다고 선언한다(7. 1). 이런 장로들의 회의체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각 회중의 장로들의 회의체, 지방 회의체, 전국적 회의체(national assembly, general assembly, 총회), 그리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국가들의 전체적 회의체가 있다고 한다(7. 2). 모든 교회의 회의체들은 교회에 관한 일과 그 직무에 관한 일들을 다루기 위해 함께 모일 합법적인 권세를 지니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를 위해 시간과 장소를 정할 권세를 가지고 있고, 다음 회의의 의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7. 3). 이는 16세기 상황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선언이 나닐 수 없다. 교회의 모임은 교회만이 소집할 권세가 있다고 선언함으로 에라스티우스적 주장을 온전히 배격한 것이다. 모든 회의체에서는 거기 모인 모든 형제들(the whole brethren convened)의 일반적 합의에 의해서 논의를 제안하고, 투표를 하도록 하고 종합하며, 모든 일을 질서 있게 하기 위해 의장(moderator)을 선택해야만 한다고도 선언한다(7. 4). 의장은 이 회의체에서 오직 교회적인 일만이 다루어지고 시민적 통치에 관한 것들이 끼어들지 않도록 면밀히 주의해야 한다고 하여 모든 이들이 다 교회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도 에라스티우스적 주장이 일체 배격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회의체는 그들의 담당 지역 내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한 사람 이상의 시찰자들(visitors)을 파송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7. 5). 그런데 여러 교회들에 대한 시찰은 한 사람이 늘 감당하는 평상적(일반적) 교회적 직임(ordinary ecclesiastical office)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런 시찰자들에게만 감독이라는 이름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앞서서 모든 목사들이 감독들이라고 언급될 수 있다고 했던 것을 상기 시키고 있다. 명확히 정해진 사안에 대하여(pro re nota) 살펴 보도록 시찰자(visitor)를 보내는 것은 언제나 장로들의 회에 속한 일이다(7. 5; 11. 11). 시찰자로서의 역할은 노회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선출되어(lawfully chosen thereunto by the presbytery) 감당하는 것이며, 그 누구도 노회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되어 그 직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교회를 시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11. 11).

장로들의 모든 회의체들의 종국적 목적은 첫째로, 종교와 교리의 순수성을 지켜 오류와 부패가 없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교회의 온전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7. 6). 이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교회 회원들의 행동에 대한 법규와 규칙을(certain rules and constitutions) 제정할 수 있다(7. 7). 또한 폐가 되고 유익하지 않으며, 시대에 맞지 않고,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된 모든 규례들은(all statutes and ordinances) 다 폐지하고 폐기할(abrogate and abolish) 권세를 가지고 있다(7. 8). 이때는 천주교 아래서 있던 모든 비성경적인 관습과 규례를 폐기 할 수 있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장로의 회는 교회적 치릴 수행하고, 모든 범과자들과 교회의 선한 질서와 정책을 무시하는 교만한 자들을 벌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니고 있으니, 한마디로 교회의 모든 치리가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7. 9).

특정한 회중 안의 장로들의 모임은 상호 협의(mutual consent)에 의해서 그 교회의 권세와 권위와 통치를(the power, authority, and jurisdiction of the kirk) 가지므로, 그 회의체를 교회의 이름으로 언급할 수도 있다고 한다(7. 10). 그러나 이때에는 3-4개의 회중이 함께 장로의 회의체를 가지고 그 권세 아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밝히고 있다(7. 10). 이것은 오늘날의 개념과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도 각 회중이 장로들을 선출하고 다른 지체들의 동의를 얻어(concur with the rest of their brethren in the common assembly) 자기 회중의 범과 문제를 가지고 회의체에 와야 한다고 말한다(7. 10). 이는 인근 다른 교회의 나이 먹은 지도자들의 지혜를 구하던 초대 교회의 관습에서 찾아 원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7. 10).

장로들의 회의는 결국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니, 그 지역 내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도록 하고, 성례가 바르게 집례 되도록 하며, 치리가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교회의 물질이 부패 되지 않게 잘 배분되도록 하는 일이 장로의 회에 속한다고 하기 때문이다(7. 12). 또한 지방 회의나 국가적인 회의나 총회가 규정한 규례들을 시행하는 것도 장로의 회에 속한다고 한다(7. 13). 또한 완고한 자들을 출교하는 일도 장로의 회에 속한다(7. 14).

교회적 직무를 감당할 임직자들을 선택하여 세우는 것도 장로의 회에 속한다. 그러므로 각 장로의 회는 그 지역 내에 충분한 능력을 지닌 목사들과 장로들이 선택되고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7. 15). 같은 이유에서 그 직무의 해임도 장로의 회에 속한다. 잘못되고 부패한 교리(erroneous and corrupt doctrine)를 가르치거나 추문에 찬 삶(scandalous life)을 사는 사람들이 여러 번 권고를 받고도 계속 저항하거나, 교회의 분리나 반역을 하거나, 신성 모독이나 성직 매매(simony), 뇌물을 받거나(corruption of bribes), 거짓말을 하거나(falsehood), 위조하거나(perjury), 음행하거나(whoredom), 도적질 하거나(theft), 술 취하거나(drunkenness), 법에 의해 처벌 될 정도로 싸우거나(fighting worthy of punishment by the law), 이자 놀이를 하거나(usury), 춤을 추거나(dancing), 악명 높을 정도로 사악하거나(infamy), 그 외에 마땅히 교회로부터 출교 받을 만한 모든 다른 악들이 드러나면 그들을 면직하고 해임하는 일도 장로의 회에 속한다.

그 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해임 되어야 하고, 그 일을 널리 알리고, 교회들은 그렇게 해임된 사람들을 직임자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7. 16). 그러나 나이 먹거나 병들거나 다른 사고로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해임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7. 17). 이런 경우에는 그 명예를 교회가 유지해야 하고, 그 직무만을 다른 이가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7. 17).

지방회의는 그 지역의 교회들의 공동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 지역의 목사들과 박사들과 장로들의 합법적인 회의를 소집해야 하고, 이는 “교회와 형제들의 모임”(the conference of the kirk and brethren)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7. 18). 이 회의체들은 더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니 그 지역의 형제들의 상호 동의와 협조(mutual consent and assistance of the brethren within the provinces)로 문제를 처리한다(7. 19).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7. 23). 그리고 그야말로 총회, 즉 하나님의 교회 전체의 협의회(council of the whole kirk of God)에 대해서도 언급하나(7. 25) 국가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8. 제 8 장: 집사와 그 직임에 대해서

집사(diakonos)라는 말이 “일꾼”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교회의 모든 직임들과 모든 영적인 기능을 다 지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여기서 집사라고 할 때는 “교회의 구제와 재물을 모으고 분배하는 일(collection and distribution of the alms of the faithful and ecclesiastical goods)을 감당하는 직임자를 뜻한다고 말한다(8. 1) 뒤에 12. 13과 12. 15에서도 이를 또 한 번 더 강조한다. 이는 당시 천주교적 습관에 따라 재량으로 교회의 재산을 사용하거나 통치자가 세운 어떤 이들이 교회 재산의 사용에 관여하던 옛 습관을 완전히 근절시켜, 교회의 재정적 독립성을 분명히 천명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아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라는 직임도 교회의 평상적(일반적, ordinary)이고 항구적인 직임[항존직]으로 여겨져야 한다(8. 2). 집사의 성격과 직무도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고, 집사의 선출과 임직도 앞서 나온 다른 영적인 직임들의 선출과 세움의 방식을 따른다고 한다(8. 2). 교회의 재물을 모으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집사직에 속한 일이므로 집사들은 장로의 회의 판단과 제정에 따라서 이를 수행해야 한다(8. 3).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재산은 사인(私人)들의 유익을 위해 전용되어서는 안 되고, 잘못 분배 되어서도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8. 3).

뒤에서 다시 강조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갈망하는 그런 질의 사람들이 집사님들로 선출되어 섬기게 된다면, 이전의 부패한 이들이 그리했던 것과 같은 교회의 재산에 대한 오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12. 13).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이 직무가 위험스럽게 보일 수 있으므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님들은 매년 목사님들과 장로들의 모임에 설명하도록 하고, 교회와 통치자가 필요하다고 여기면 그들의 신실성을 설펴 보는 감사(cautioners)들이 책임을 다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하고 있다(12. 14).

9. 제 9 장: 교회의 재산(patrimony)과 그 배분에 관하여

교회의 재산이란 이전에 주어졌거나 앞으로도 무엇이든지 공적인 유익과 교회의 사용을(the public use, and utility of the kirk) 위해 교회에 기부된 재산, 또는 동의나 보편적 관습에 의해 주어진 재산을 말한다(9. 1). 합법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의 재산을 얻거나 또 교회의 재산을 어떤 개인의 특정한 유익을 위해 전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다(9. 2). 교회의 재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한 바와 같이 집사들이 거두고 분배해야 한다(9. 3). 이는 사도 시대의 교회의 예를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를 적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뿐만 아니라 교회의 합당한 직임자들의 보조와 병든 자들을 위한 기금과 학교와 학교 교사들의 유지비용 등에도 이 교회의 재산을 활용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9. 4).

10. 제 10 장: 기독교적 통치자의 직임에 대하여

당시 교회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의 회원이므로 통치자도 교회의 회원이었다. 그래서 <제 2 치리서>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직임이 어떤 것인지도 규정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그들의 소명[직업]에 따라서 각자의 능력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진전시키도록 되어 있으니, 기독교 군주들과 다른 통치자들도 같은 일을 하도록 되어 잇는 것이다”(10. 1). 여기 성경적 소명관이 잘 나타나 있고, 성경적 소명관에 따라 기독교적 통치자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도 잘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통치자들은 교회를 유지하고(maintain), 양육하고(foster), 지지하고(uphold), 그리고 교회를 해치는 모든 것에 대항해서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defended against all that would procure the hurt thereof) 말한다(10. 1).

모두가 그리스도인인 시기에 교회와 관련한 기독교 통치자의 직무가 어떠한 것임을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통치자는 (1) “모든 면에서 교회의 경건한 진전을 돕고 강화해야(assist and fortify the godly proceedings of the kirk in all behalfs)하고(10. 2), (2) 교회가 거짓 교사들이나 삯군들에 의해 침범 당하거나 손상 받지 않도록 하며, 그 자리가 벙어리 개들과 배만 위하는 게으른 자들에 의해 점령 되지 않게 하며(10. 3), (3) 교회의 치리가 유지되도록 도우며, 교회의 치리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시민적으로도 벌하며(10. 4), (4) 사역과 학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충분히 지원하고(provision)(10. 5), (5) 교회의 재산이 세속적이거나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사용도지 않도록 하고, 특히 게으른 이들의 배를 위해 사용되지 않도록 하여, 교회의 재산이 사역과 학교와 가난한 사람과 다른 경건한 용도에 바르게 사용되도록 하며(10. 6), (6) 교회와 그 정체의 진전을 위해서 법과 규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10. 7).

11. 제 11 장: 아직까지 교회에 남아 있는 개혁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

스코틀란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어 받아들여지고, 제 1치리서가 받아들여져서 개혁을 이루었으나(1560) 그로부터 17-18년 지난 1578년에 아직도 스코틀란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문제점들의 개혁에 대해서 <제 2 치리서>는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길게 논의하고 있다. 1560년 이후로 의회의 법령(act of parliament)에 의해서 천주교적 예배와 천주교적 예배의 처소와 천주교적인 통치(the Papistical kirk and jurisdiction)가 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나 아직도 스코틀란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천주교적) 오용(abuses)들이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11. 16), 이런 점들은 제거되고 온전히 뿌리 뽑혀야만 한다(removed, and utterly taken away)고 한다(11. 1).

첫째는, 그런 기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사라졌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천주교적 직책에 대한 용어들(papistical titles of benefices)의 사용은 오용들(abuses)이므로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다시 선언한다(11. 2). 그런 직책의 대표적인 것들이 수도원장들(abbots), 영혼을 맡은 자들(commendators), 소수도원 원장들(priors), 소수녀원 원장, 즉 원장수녀(prioresses), 그리고 수도원의 다른 직책들에 대한 명칭들이다. 또한 감독이라는 명칭도 성경의 의도와는 달리 오용되었었고 당시에도 여전히 오용되고 있다고 한다(11. 9).

소위 감독이라고 불리던 직임의 감당자가 목사들의 목사(pastor of pastors)이거나 많은 회중들의 목사(pastor of many flocks)라고 말하는 것이나 그들은 일반적 가르침의 직무를 담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선언한다(11. 13). 그러나 참된 감독들은 특정한 회중과 연관되어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선언하고, 그들은 그 형제들 위에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전의 감독이었던 분들이 상당수는 그리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11. 1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또한 교회 일반이 그들에게 규정한대로 하지 않으려한다면 교회에서 그 직무가 박탈되어야 한다(to be deposed from all function in the kirk)고 선언한다(11. 14).

이와 비슷하게 건물과 직책의 이름들이 남아 있는 것도 온전히 제거 되어야만 한다(utterly abrogated and abolished)고 말한다(11. 3). 예를 들어서, the chapters and convents of abbeys 또는 대성당 교회(cathedral kirk)와 같은 건물의 이름이나 대성당의 수석 사제(the deans), 대집사(archdeacon), 선창자(chantor), 부선창자(sub-chantor), treasurers, chancellors 등과 같이 교황제도로부터 나오고 천주교회 법에 근거한 직임들의 명칭이 그러한 것들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이런 오용자들이(abusers) 의회에 참여하여 투표하거나 교회의 이름으로 위원회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11. 5; 11. 15).

또한 이런 사람들이 제후의 허락에 의해서든지 교회의 허락으로 5개에서 심지어 20개 이상의 교회들을 담당하고 그 교회의 성직록을 받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11. 6). 좀 더 구체적인 예로 참된 종교를 받아들인 (즉, 종교개혁에 동의한) 이전 성직록 수혜자들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이전의 받던 금액의 2/3만을 받고 아무 일도 안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그런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도 안 된다고 강하게 말한다(11. 7; 11. 18). 개혁된 교회 안에서는 이런 오용이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직책들과 관련하여 그에 부속되어 있는 여러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갈망하는 바같이(as God's word craves), 마땅히 나뉘어져서 개별적인 회중들이 자격이 있는 목사님들의 가르침 아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1. 4).

목사가, 이전의 주교와 같이, 사법적인 판결을(the criminal jurisdiction) 감당하는 일도 부패라고 선언한다(11. 12).
또한 모든 것이 잘못 되었던 때(when things were out of order)인 메리 여왕 때 세워진 많은 위원들이(the commissioners) 교회의 허락이 없이 목사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해임하는 등 교회의 일에도 간섭하는 일이 여전히 있는 바, 그들은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판단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에 관여해서도 안 되며, 교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더 구체적으로 선언한다(11. 17).

이로부터 우리는 이 세대의 교회가 인간들의 문제 때문에 아직도 여러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고도 철저한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들이 바라는 개혁은 “하나님 말씀에 가장 부합하는 질서”(that order which is most agreeable to the word)를 교회 안에 세우는 것이다(12. 1; 12: 10[“this order, which God's word craves”]).

12. 제 12 장: 우리들이 갈망하는 개혁
(Certain Special Heads of Reformation Which We Crave)

그렇게 하나님 말씀에 가장 부합하는 질서, 하나님의 말씀이 갈망하는 질서(12. 10)는 과연 어떤 것인지를 <제 2 치리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1. 전국을 몇 지역들(provinces)로 나누고, 그 지역들을 다시 교구들(parishes)로 나누어 각 교구의 회중들에게 한 사람 이상의 목사님들이 세워지는 것. 즉, 한 목사님이 한 회중 이상을 감당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12. 2).

2. 자격 있는 목사님을 찾기 어려우므로 필요하면 여러 회중을 하나로 합하고, 또 반대로 회중이 너무 많을 때는 그 큰 회중을 여러 회중들로 나누어야 한다(12. 3).

3. 박사들이 대학과 각 급 학교와 필요한 곳들이 세워져야 하고, 충분히 생활이 지지되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의미를 풀어 주도록 하고, 학교를 책임지게 하며, 종교의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12. 4).

4. 각 회중마다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세워져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장로의 회는 도시와 중요한 곳들에 있어서 여러 회중들의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그들이 함께 돌아보는 회중들의 문제들을 같이 다루도록 해야 한다(12. 5).

5. 지역 교회들의 회의인 지방회나 대회(provincial and synodal assemblies)이 어디서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교회의 자유와 그 규례에 맡겨져야 한다(12. 7).

6. 총회도 항상 그 자유를 가져야 하고, 모이는 시간과 장소도 교회가 자유롭게 정해야 한다. 교회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통치자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교회 전체 회의의 판단에 종속해야 한다고 명백히 선언한다(12. 8).

7. 교회의 모든 직임자들의 선출은 사도들의 교회와 초대 교회의 예와 선한 질서가 갈망하는 바와 같이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과 백성의 동의(lawful election and the assent of the people) 없이는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일에 통치자나 누구도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12. 9).

8. 천주교적 방식으로 교회에 기부된 것들이나 앞으로 주어질 것들이 성경 말씀에 부합하게 사용될 것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이 진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과 이 교회의 바른 법이 갈망하는 이 정책과 질서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헛된 말이 되는 것이다.”고 강하게 말한다(12. 10,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9. 그러므로 교회의 재산과 기부된 것은 기본적으로 다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한 부분은 목사님들에게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삶의 편의를 위해(for his entertainment and hospitality) 드리고, 한 부분은 장로님들과 집사님들과 회의체의 서기 같은 교회의 다른 직원들에게 맡겨서 그들로 하여금 시편 집들을 마련하고, 교구 관리와 예배당 유지를 위한 직원들을 위해 필요한 일들에 사용하도록 하며, 또한 옛부터 물려온 기금들을(the ancient foundations) 활용하여 지지되는 학교의 박사들을 지지하는 일을, 필요한 경우에는, 더 돕도록 하고, 세 번째 부분은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과 병원(빈민 구호소)에게 주어지도록 하며, 네 번째 부분은 예배당 보수비용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위해,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공공의 유익(the common weal)을 위해 주어져야 한다(12. 12).

13. 이런 개혁의, 모든 지위의 사람들에 대한, 유용성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이런 개혁이 과연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면서 결국 이는 모든 지위의 사람들에게(to all estates) 유익한 것임을 천명한다. 이런 개혁, 즉 이 문서가 말하는 영적인 통치와 정체(this spiritual government and policy whereof we speak)의 궁극적 목적은 (1)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시고(God may be glorified), (2) 그리스도의 왕국이 진전하며(the kingdom of Jesus Christ advanced), (3) 그의 신비한 몸의 모든 구성원들이 양심의 평화를 가지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all who are of his mystical body may live peaceably in conscience)고 선언한다(13. 1). 이런 곳에서 이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이들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던 분들인지가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목적으로 참으로 존중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위해서라도 이런 질서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고 따르리라는 것을 담대하게 확언한다고도 말한다(13. 1).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종교를(신앙을) 고백하는 다른 민족들과 나라들과 교회들에게 선하고 경건한 질서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의식도 나타나 있다(13. 2). 또한 교회와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배려와 돌봄의 필요성이 강하게 표현되기도 한다(13. 3). 또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니, 이런 잘 따르면 필요 이상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13. 4).

그리하여 다음 같은 문장으로 이 문서는 그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군주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그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이들이 이 질서에 기꺼이 자신들을 복종시키려고 하며, 이에 따라 다스림 받기를 원하고, 교회적 직임들에 세워진 분들이 바르게 통치한다면,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고, 교회가 세워지고 그 지경이 넓어질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사탄과 그의 나라가 전복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위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모든 영원 가운데 복된 중에 거하시도다. 아멘.

III. <제 2 치리서>의 특성들과 안타까운 점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살펴 본 <제 2 치리서>는 성경 말씀에 따라 스코틀란드 국가 전체와 특히 교회를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매우 중요한 거의 법규적인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문서의 특성을 말하고, 이에 대한 안타까운 점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제 2 치리서>의 특성들

가장 뛰어난 점은 역시 그것으로 <제 2 치리서>가 유명해진 노회 제도의 의미를 잘 드러낸 것이다. 장로의 회가 일정한 지역의 교회들을 함께 목회하고 돌아보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한 것을 유의해야 한다. 노회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교회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면서 교회 전체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며 이루려고 노력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교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총회가 모이는 것에 대해서나 지방의 대회가 모이는 것에 대해서나 교회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한 외부의 간섭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재정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자유도 매우 강조하는 것을 통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교회의 자유를 천명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제 1 치리서>에 비해서 그 점이 많이 강조되지 않아서 안타깝지만, 대학과 가극ㅂ 학교 교육에 대해 염려하면서 이곳들이 박사들이 세워지고 그들에게 충분한 생활의 지지를 하게 하여 성경을 열러 주고, 종교의 근본적인 것들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역시 교육에 대한 스코틀란드 개혁자들의 강조를 높이 사게 한다.

넷째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속한 교회와 사회 전체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라보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에 나타난 문서라는 것을 주목하여 보게 한다. 따라서 제안이 매우 구체적이고 당시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2. 안타까운 점

<제 2 치리서>의 이와 같이 고귀한 성격을 높이 사며 많이 배우려고 하면서도 역시 이 문서도 그 시대의 산물이기에 몇 가지 안타까운 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에라스티우스주의를 명백히 배격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인 국가 상황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시대적 성격이 나타나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고 그 독특성과 문제를 의식해야 한다. 더구나 이 문서에서는 기독교 통치자들에게 기독교 국가를 다스리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것을 그대로 우리의 세속적 국가들에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로, 비상직원들을 잘 언급하여 평상 직원들과 달리 신약 교회를 세우는 시기에 나타난 창설 직원으로서 비상 직원들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 직임들은 영구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그쳐졌다”(2. 6)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 것은 좋으나, 시대에 따라 그런 직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 특히 오늘날 우리들의 신사도 운동에 힘쓰는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 문서의 작성자들이 우리 시대에 있었다면 이 분들은 신사도 운동을 지지할 리 없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이 문서를 읽어야 한다.

셋째로, 목사님들만 감독이라고 표현한 것이(4. 1; 11. 9) 혹시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오용될 소지가 있어 보인다. 성경의 용례를 따라서 넓은 의미의 장로, 즉 목사와 박사와 장로가 다 장로이니, 성경에서 장로를 동시에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는 용례를 따라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한 곳에서 목사님들을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라고 표현한 것은(10. 7) 그들의 가르침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개혁파적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없으나 혹시 그 직임의 계승처럼 천주교회나 성공회적으로 오해하면 안 되므로 지양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넷째로, 각 회중 마다 장로의 회를 가지지 않도록 한 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해되나 결국 후대에 발전된 당회에 대한 온전한 모습도 미리 바라 보며 제시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IV. <제 2 치리서>의 현대적 함의

그렇다면 <제 2치리서>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하고 그에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을 우리 시대에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매우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규례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그것이 교회인 한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야 한다.

둘째로, “장로들의 모임”의 정신의 회복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함께 목회하고, 함께 성도들을 돌아본다는 정신이 없이는 노회로 모이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배들의 노력으로 피 흘려 이루어진 귀한 노회 제도를 가진 우리들로서는 교회가 참 교회로서의 의미를 지니도록 성경이 말하는 정신에 따라 노회가 어떠해야 함을 지시하는 이 문서가 말하는 의미의 노회의 모습이 우리들이 노회 모임 속에서, 총회로 모이는 속에서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 시대에 아직도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천주교적 잔재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고 그에 따른 노력을 지속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수도원 제도의 철저한 청상을 요구하면서 심지어 수도원 안에서 직책을 지녔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일소(一宵)하려고 하던 바를 생각하면서 우리 시대에 일종의 개신교적 수도원의 필요성을 말하며 그런 것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우리들의 문제를 깊이 의식하면서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고쳐 나가려는 계속되는 개혁이 늘 필요한 것이다.

넷째로, 교회의 다스림이 목사와 장로들에게만 주어진 권세라고 하며, 교회의 재정 관리는 집사들에게 주어진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교회의 자유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었음을 유념해서 오늘 날도 그 어떤 방식으로도 교회의 자유가 침범 당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이전에는 천주교적 고위 성직자나 통치자가 세운 어떤 인물들이 교회의 재산을 재령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오늘날은 교회 공동체의 특정한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을 재량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처럼 하는 것이 문제요, 결국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가 교회 공동체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학교를 세우고 학교를 잘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돌봄과 진정한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책임이 교회에 주어진 책무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사회,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부합한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노력한 그 전례를 잘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사회와 국가는 모든 사람이 교회의 성원인 사회와 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적용의 차이를 있어야 하지만, 사회 전체를 말씀의 빛에서 바라보고 판단해 나가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고, 그것을 이와 같이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실현하는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 기사의 원활한 제공을 위해 각주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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