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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평화’,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① 본문

교회와 통일

[특집] ‘평화’,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①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5 16:38

“평화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 / 2014년 11월 5일 기사

 

최근 한국기독교학회가 ‘평화’를 주제로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회 산하 13개 분과 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경학자, 조직신학자, 실천신학자, 기독교윤리학자, 기독교교육학자, 선교신학자, 여성신학자 등이 ‘평화’와 관련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평화’에 대한 신학자들의 일부 목소리들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 주>

# 구약신학회, “참된 평화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으로 이루어져”

도시와 국가의 문명체제 하에서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체제 자체가 가인의 폭력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사람과 창조계를 폭력으로 다스리는 체제임을 누누이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국가체제 속에서 고난당하는 셈의 자손들이 작은 평화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살해당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계보는 노아에게서 한 매듭을 지었다고 다시 노아의 아들 셈을 통해 아브람에게 대를 이어 내려간다. 이윽고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회복하시려는 원대한 구원사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국가에 대한 대안사회라고 선포하면서 참된 평화의 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평화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세계의 정치공동체들 간에 이루어지는 권력의 상호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한다. 세계의 정치공동체의 임무와 필요성을 강조하고 국제공동체의 건설을 지지하면서도, 교회는 그 한계를 지적하고 평화의 본질을 하나님나라의 전망 안에서 논한다.
오경은 평화의 본질을 교회에게 가르쳐준다. 평화는 국가나 도시의 정치적 힘과 이해관계의 균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만도 아니며, 적대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도 아니며, 또한 권력자가 국민을 잘 통치하여 얻어진 결과물도 아니다. 오경이 가르
치는 평화는 도시와 국가가 줄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정의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바탕 위에서 실현되지 않는 한 그 사회의 평화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또 개개인의 영성에서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공동체의 평화는 의미가 없다. 반대로 공동체의 평화가 영속되지 않는 한 개인의 평화도 없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 교회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심고 평화가 뿌리를 내리도록 일해야 한다. 오천 년의 문명사가 인간의 심성 속에 심어 놓은 이기심과 폭력성의 뿌리를 뽑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할 당위가 생긴다. 죄의 존재가 변화를 받아야 평화가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평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평화를 받아야 인류가 살아온 폭력의 문명을 평화의 문화로 전환할 수 있다. 이 평화의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우리들에게 큰 나팔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오경의 평화신학 / 이영재 박사, 전주화평교회>

# 구약신학회2, “하나님의 의의 질서와 접속할 때 ‘샬롬’이 완성”

영원한 샬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표상하는 영원한 ‘의’와 ‘정의’에 의해 구축된 질서다. 그것은 단순히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메시아 예언 본문들인 이사야 9장 6-7절(히, 사 9:5-6)과 스가랴 9장 9-10절에서 ‘샬롬’이 인간의 참여를 진작시키되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메시아로서의 왕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샬롬’을 드러내는 렌즈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샬롬’에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해준다. 또한 ‘샬롬’의 수립 과정에서 전쟁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추구되면 ‘샬롬’이 가능하다. 전쟁이 반드시 ‘샬롬’의 반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권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성취를 위한 왕정 이데올로기를 고집한다면, 관계적 온전을 지향하는 ‘샬롬’의 세상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샬롬’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의의 질서와 접속돼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샬롬’을 향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력의 한계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와 스가랴의 시각처럼 저마다 자기 성취와 이해에 매몰된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바른 질서에 대한 응답의 차원으로서 착취, 억압, 불평등, 인권 침해 등을 해소하는 관계적 온전, 곧 ‘샬롬’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메시아 예언 본문들에 나타난 ‘샬롬’의 의미 / 홍성혁 박사, 서울신대>

# 신약학회, “예수는 평화의 왕이다”

요한복음에서 “평화”라는 말은 6번 모두 예수를 통해서만 발설된다. 요한복음은 “평화”라는 말 외에도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한 평화 개념들과 상징들을 도입하고 재해석하여 예수 평화를 선포한다.

요한복음 저자와 유사하게로마의 평화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로마 및 유대 교육 모두를 받은 필로와 요세푸스는 당대 저자보다 고대 저자를, 로마 저자보다 그리스 저자와 유대 전통을 선호했다. 특히 필로의 용어와 상징들은 요한복음의 것들과 유사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 저자나 필로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문헌들을 정말 참고했는가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저자들이나 널리 퍼진 대중상식을 통해 그 본문들을 간접적으로 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철학적·문학적 수준이 필로보다 덜하지 않고 때로는 그리스로마나 유대전통에서 유래한 사상을 몇 단어에 담아 필로전통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을 전개하므로, 요한복음 저자가 필로 뿐 아니라 필로의 선행문헌들을 직접 참고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재할 수는 없다.

필로와 요세푸스와 그들의 주요 선행문헌들과 요한복음을 비교한 결과, 모든 문헌에서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 개념이 탐지되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우주 및 신들의 질서와 인간정의가 상호 의존하며, 평화는 인간들과 신들과 삼라만상이 서로 배려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이해했는데, 이런 평화 개념은 호머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도시에 대한 묘사와, 헤시오드의 질서 및 정의 개념과, 플라톤의 이데아 및 로고스 사상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로 사랑 주제와 공명한다.

그리스인들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식고 정의가 위협받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 신령한 장치가 있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심판, 처벌, 보상, 회복하는 과정에 전쟁과 평화가 있다고 이해했다. 유대 전통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위한 전쟁과 평화, 메시야나 하나님이 가져오는 평화 사상 등이 있었는데, 요한복음은 두 전통 모두를 응용하여 로고스 예수를 통한 평화와 질서 회복,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논한다.

한편, 필로는 플라톤의 심리적·철학적 평화 개념을 강화하여 유대전통으로 재해석했고, 유사한 개념이 요한복음에도 나타난다. 플라톤은 영혼을 평화지향적인 속사람(로고스)과 전쟁지향적인 겉사람(혼과 육)으로 나누었는데, 필로는 전자를 이스라엘로 후자를 모압족속(혼)과 암몬족속(혼)으로 재해석했다.

필로는 모세를 신-왕으로, 로고스를 이스라엘의 왕이며 평화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묘사했다. 요한복음은 유사한 어법을 사용하면서도, 필로의 유대 편향성을 배제하며, 민족과 배경을 넘어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한다.

더불어 요한복음은 모세가 아닌 예수가 신-왕이며, 예수가 로고스요 이스라엘의 왕이자 평화의 왕임을 다양하게 입증한다. 특히, 솔로몬의 평화시대에 관한 구약성경의 묘사들을 적극 도입하고, 메시야가 가져오는 평화의 혜택이나 평화의 왕에 관한 구약 사상(삼하 7:12-17; 사 9:5; 슥 8:12; 9:9-10)을 더하여 예수 평화를 강조한다.

요한복음 한편에는 미움, 배신, 분열, 거짓말, 살인, 핍박, 죽음, 부당한 심판, 세상임금, 마귀 등 전시를 방불케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으나, 다른 편에서는 밝은 주제들이 예수 평화를 선포하며 어둠을 압도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참 포도나무요 열매 맺는 포도나무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결혼식과 축제와 많은 열매와 포도주와 생수와 떡과 건강과 거처와 빛과 기쁨과 영생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평화의 왕이다.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평화:요한복음의 평화연구 / 문우일 박사, 서울신대>

# 역사신학회, “평화는 성화를 위한 여정과 복음전파에 있어 필수”

웨슬리는 전쟁을 원죄의 결과로 볼 뿐만 아니라 전쟁을 원죄의 증거로 사용한다. 또한 그는 예언자적인 차원에서 말할 때 전쟁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정당한 전쟁의 법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즉 절대적인 정당방위가 필요할 경우에 적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한다. 더 나아가 외국의 침입이나 내부의 반란의 경우에도 자신을 방어할 목적의 전쟁을 인정한다.

그는 평화와 질서의 유지가 그리스도인과 정부의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더라도 그 목적은 평화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당한 전쟁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였던 성화 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주장이 전쟁의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지를 심각하게 성찰했다는 흔적이 별로 없다.

그는 평화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전제로 하며, 이것은 내적이며 영혼의 평화이다. 이 평화는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여정과 복음 전파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러한 평화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정치 군사적인 평화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며,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를 만든 자’(peacemaker)라고 생각했지만, 반전 평화주의자(pacifist)를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는 반전 평화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될 수 없다거나, 비폭력 평화주의자 자체가 평화를 만드는데 더 효과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입장에서 그는 보다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 초기에 미국 식민지 시민들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국교회의 아들로서 기본적으로 토리적인 입장을 고수하였고, 왕정에 대한 충성과 신뢰를 보여준 반면에 민주 공화정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었다. 그는 영국 왕의 치하에서 국내나 식민지에서도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식민지 시민들이 노예나 여성이나 어린이들의 인권과 자유를 옹호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미국 식민지 시민의 독립전쟁을 반란으로 규정하였으며, 영국 정부의 정당한 폭력의 사용을 승인하였다. 존 웨슬리는 자신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사상,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이해를 내면적 영적인 차원에서는 이상주의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밀고 나갔으나, 정치적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철저하게 현실 순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도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인 존 웨슬리의 성화 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사상을 내면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전쟁의 상황에서 일관되게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미국의 메소디스트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소수이고 예외적인 현상이었지만, 기꺼이 박해를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믿음과 사상에 충실하게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전후 미국의 메소디스트 운동의 영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존 웨슬리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해-미국 독립전쟁과 관련하여 / 이성덕 박사, 배재대>

# 조직신학회, “하나님의 평화는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

분단의 땅 한반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는 빗겨갈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의제이다. 제10차 WCC 부산총회는 이러한 평화의 문제에 대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서와 사건들을 남겼다.

빌립보서 4:7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개역개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개역개정의 다른 구절들처럼 도무지 평화를 생각하게 할 수 없는 번역이다.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시 85:10)도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춘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도 ‘평안’이나 ‘평강’이 아니라 ‘평화’였으면 얼마나 이해가 쉬웠을까. 빌립보서 4:7을 공동번역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평화’는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이고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평화이다. 새로운 기독교 평화신학은 여기서 영감과 통찰을 얻어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는 WCC는 이번에 평화에 대한 새로운 교회의 언어를 내놓는데 실패했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국의 문제는 곧 하나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의 문제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평화’라는 개념과 이어진다. ‘의로운 평화’(just peace)는 스스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포괄적이고 온전한 비전”을 담은 하나의 새로운 평화 방법론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혹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 신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10차 WCC 부산총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주제는 아직도 살아있다. 부산총회의 주제에 한 단어만 추가한다면 이 기도문은 이렇게 바뀐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lead us to Your Justice and Peace). 우리는 오늘도 생명의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평화’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WCC 평화신학의 이해와 비판 / 장윤재 박사, 이화여대>

# 기독교윤리학회, “평화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가는 것”

본회퍼의 윤리는 ‘교회론적 평화윤리(ekklesiologische Friedensethik)’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 이해의 지평에서, 교회의 이해로부터 출발한 본회퍼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교회연합을 위한 신학적 정의에서 교회의 평화적 과제를 논의하며, ‘나를 따르라’와 ‘윤리학’에서는 각각 ‘평화교육’과 ‘평화윤리’ 사상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평화주의나 정당전쟁론이라는 교회사의 평화에 대한 두 거대담론 가운데 어느 한쪽에도 속할 수 없는 본회퍼의 평화개념은, 어떠한 ‘안전(Sicherung)’이나 ‘원칙’에 근거한 평화윤리적 담론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본회퍼의 평화에 대한 모순적 입장들은, 오늘의 현실가운데 자기목적을 가린 채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 이해’라는 그의 삶과 신학의 정선율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과 시대적합성을 고려한 평화지향적 선택들이,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자기목적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회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현 한국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분열과 비평화적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세월호 사태 이후의 모습들에 대해서, 그리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국가들을 향해서 한 개인이나 단체, 국가들의 자기목적을 위한 주장만을 내세우지 말고, ‘책임윤리’, ‘공동체의 윤리’, ‘제자됨’, ‘교회됨’의 회복을 통해, 진정한 ‘하나의 우리’를 이루어 나가라고 주문하고 있다. 본회퍼는 어떠한 원칙이‘하나님의 현실’을 방해한다고 보았으며, 시대와 현실에 적합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분별을 통한, 평화지향적 교회를 희망한다.

아울러 본회퍼는 우리에게 ‘타자를 위한 교회’, 즉 ‘평화를 위한 교회’의 다양한 모델들을 마련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교회의 평화설립을 위한 실천적 과제들은, ‘예수 되기’의 형성을 통해 ‘고난을 당하는 사랑’과, ‘선의 실현’을 통한 ‘교회됨’이며,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일 것이다.

본회퍼는 21세기, 이 땅의 교회에 ‘교회의 과제로서 평화설립’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 당면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적극적인 대안마련과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평화는 한 순간에 이뤄질 수 없다. 평화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다.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영역을 나누고, 그리스도인 개인의 윤리와 교회로서의 사회윤리를 나누며 이분화된 교회의 모습은, 본회퍼의 이해에 근거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집단인격’의 융합된 이해인,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의 사회 제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비현실적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는 ‘산상수훈’을 ‘현실적합성’을 배제한 채, 하나님의 뜻을 피안(jenseits)에 가두며, 자기목적에 맞는 새로운 율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한 것은, ‘폭력을 통한 저항’이기에 ‘비평화적’이라는 윤리적 정죄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의 자유안에서의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뜻의 분별은, 우리 시대에 처한 ‘미친 운전사’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그 분별은 언제나 인간의 자기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공동체, 즉 ‘교회’를 이루고 있을 때 가능하며, 그 행동은 본회퍼의 진술을 인용하자면, ‘책임적 자유안에서의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이다’라는 관점은 보편적일 수 없다. 본회퍼를 해석하는 이들은 자기 목적을 숨긴 채, 본회퍼의 입장들을 성급하게 일반화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지 늘 주의해야 한다. 본회퍼의 평화 개념은 오늘날 시대적 사유체계 가운데 자기 목적을 감춘 채 모방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현실 적합한 전환과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근거한 계속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디트리히 본 회퍼,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인가? / 김성호 박사, 서울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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