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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한국 내한은 18세기 근대선교운동의 결실 본문

역사와 신학

선교사들의 한국 내한은 18세기 근대선교운동의 결실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5:10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ㆍ한국교회사학회, 공동학술대회 개최 / 2015년 3월 31일 기사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가 지난 3월 28일 토요일 오전 9시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진행된 공동학술대회에서 임희국 교수(장신대)와 이상규 박사(고신대)가 주제강연자로 나서 각각 ‘양화진의 역사와 외국인 묘지’, ‘근대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 선교사들의 한국 내한은 18세기 근대선교운동의 결실

‘근대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을 주제로 발표한 이상규 박사는 “한국 기독교의 기원은 근대선교운동의 결실”이라며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탄생은 자생적 창립이나 서구 교회와의 절연에서 이루어진 비상이 아니라 접경과 연경을 넘는 선교운동의 연속에서 이루어진 결실”이라고 설명했다.

윌리엄 캐리로 시작되는 근대선교운동의 전개과정, 특히 라토렛(K. S. Latourette)이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불렀던 19세기 이후 전개된 선교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한국선교운동을 언급한 이상규 교수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 혹은 선교사의 내한은 선교운동의 국제사적 연쇄, 곧 각종 선교운동을 종횡으로 연결하는 상호관련 및 선교사상의 연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윌리엄 케리의 선교활동을 비롯해 런던선교회(LMS), 영국교회선교회(CMS), 화란선교회, 바젤선교회, 중국내지선교회(CIM) 등 새로운 선교단체의 조직, 미국 교회의 선교활동을 비롯해 내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18세기 말 윌리엄 케리로 시작되는 근대 혹은 현대선교운동은 국제사적 전개를 통해 선교부 간의 상호 연쇄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아시아로 확산돼 기독교는 한국으로 전파된 것”이라고 피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812년 미국이 해외선교운동에 동참한 이후 미국선교사들의 진출이 현저했고, 1830년대 이후 선교영역의 변화는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동참을 가져왔다. 이는 전문인 선교를 확대해 여성도 선교의 동반자라는 점도 보여줬다.

특히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과 학생자원운동(SVM)은 미국 교회의 해외선교 동력원이 돼 1900년 이후 미국이 세계선교운동을 주도했고, 한국 선교를 주도하게 된다. 내한 선교사들의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였다는 점이 이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이 교수는 “내한 선교사들은 서구문화 전파자의 역할을 감당해 서구적 가치를 전수했고, 선교사 인력의 절대다수를 점했던 미국 선교사들은 초기 한미관계의 전개, 근대한국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며 “피선교지 교회는 선교지 교회의 영향하에 있게 됨으로써 초기 한국 교회의 예전 신앙형태는 미국장로교회에 의해 주형됐다”고 덧붙였다.

# 양화진이 외국인 묘지로 정해진 이유

‘양화진의 역사와 외국인 묘지’를 주제로 발표한 임희국 교수는 “조선왕조의 초창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양화진은 외교, 국방, 무역, 종교 등 여러 방면으로 대외적 요충지였다”며 “양화진이란 명칭은 ‘버드나무 꽃’을 뜻하는 양화(楊花)에다가 ‘나루터’를 뜻하는 진(津)을 합친 것으로써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임 교수에 따르면 양화진은 교통과 상업 및 무역의 요충지였다. 수도 서울에서 양천,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중요한 물길이었고, 거꾸로 서해안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또한 국방상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침략하는 외세를 대비해 방어진지가 구축돼 있었다.

특히 임 교수는 “1866년(고종 3년)에 병인양요가 발발한 이후 양화진은 순교 현장이기도 했다”며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일대를 침입해 온 것을 빌미로 정치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보복을 자행했다. 통외분자로 지목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등 대대적인 천주교도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876년에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풀고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정지었다. 이후 개화사상가들의 역할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었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종교(기독교)는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임 교수는 “급진개화파들은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구상을 하게 됐고, 급진개화파에 속한 김옥균은 일본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조선 선교를 요청하기도 했다”며 “이후 다양한 만남과 선교사 맥클레이와 왕실과의 접촉 등을 통해 1885년 미국의 개신교가 선교사 6명을 조선에 파송했다”고 설명했다.

즉,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튼 부부, 스크랜트 모부인, 언더우드 등이 1885년 4월 5일에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것이다. 반면, 조선정부는 이들의 선교활동 범위를 교육과 의료 부문으로 한정했고, 공개적인 포교는 금지시켰다.

그렇다면 양화진은 어떻게 ‘외국인 묘지’로 선정됐을까?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은 독일(1883), 영국(1884), 이탈리아(1884), 러시아(1885), 프랑스(1887)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잇따라 통상조약을 맺었다.

임 교수는 “통상조약 가운데는 외국인이 조선에서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협약을 맺은 항목이 있었다”며 “외교협정을 맺은 서양 국가의 외국인이 조선에서 사망할 경우 조선정부는 묘지용 땅을 무료 임대하기로 약속한 조약이었다”고 피력했다.

이 조약에 따라 1890년 4월 22일 프랑스 공사가 새남터(용산구 한강변)를 외국인 묘지로 지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또한 석 달 뒤인 7월 24일 미국 공사는 서울 남대문 밖 남산 기슭(지금의 힐턴호텔 근처로 추정)에 외국인 묘지를 설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당시 선교사 헤론은 질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 공사는 그가 곧 사망할 것으로 예견하면서 묘지 설정을 요청한 것이다. 결국 헤론 선교사는 사망했고, 미국 공사는 다시 한번 외교 경로를 통해 묘지를 지정해 주도록 조선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사유지인 양화진 땅을 매입했고, 이때부터 조선정부는 외교협정을 맺은 각각의 나라에게 무료 임대해 외국인 묘지로 사용하게 하면서 구한말까지 외교, 국방, 무역,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외적 요충지였던 양화진은 외국인 묘지가 됐다.

임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양화진에 묻힌 외국인은 선교사 이외에 외교관, 사업가, 정치가, 군인, 언론인, 교사, 음악가, 기술자 등 다양하다.

특히 ‘양화진 외국인묘지, 토지소유권의 역사적 진실’(신호철 편저, 양화진선교회, 2008년)에 따르면 2005년 현재 555기의 외국인 묘가 있으며, 이들의 국적은 미국(279), 영국(31), 캐나다(19), 러시아(18), 프랑스(7), 필리핀(5), 독일(4), 스웨덴(4), 이탈리아(2), 덴마크(2), 일본(2), 남아공화국(1), 호주(1), 폴란드(1), 뉴질랜드(1) 등이다. 이 가운데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는 167기다.

임 교수는 “현재 양화진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을 안고, 우리나라에 와서 헌신적인 삶을 산 그들은 하늘의 천사였다. 비록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도 했지만 그들의 허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다. 따라서 우리도 그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언더우드 선교사역:에큐메니즘을 중심으로(이은선 교수, 안양대)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그의 삶의 전환점을 중심으로(오지원 교수, 침신대) △올리버 알 에비슨의 삶과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영식 교수, 총신대) △메리 스크랜튼의 여성 교육 활동과 개화기 한국 ‘여성주의 의식’의 태동(양현혜 교수, 이화여대) △터너(한국명/단아덕, 1862~1910) 주교(이정구 교수, 성공회대) △구세군 사령관 참장 제임스 토프트:그의 삶과 사역, 그리고 구세군 분규 사건에 관한 역사적 조명(김준철 사관, 구세군) 등의 연구논문도 함께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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