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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신학’ 추구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교회와 사회

‘공적신학’ 추구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5:23

 

한국 교회와 사회 속의 공적신학의 가능성 모색 / 박성규 교수 / 2015년 4월 14일 기사

 

 

“공적신학이 가능하기 위해 가장 급선무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교회의 개교회주의 극복,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 회복, 목회자들의 공적 직분의식 확립,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 회복, 교회와 신학의 책임적인 사회적 담론을 위한 두 가지 언어(성서의 언어와 이성의 언어 또는 신앙의 언어와 사적 언어)의 섭렵 등이다.”

“공적신학은 목회적 차원, 논증적 차원, 정치적 자문의 차원, 예언자적 차원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지금 공적신학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공적신학은 사회적 담론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 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사회는 정의와 평화를 요구한다. 이는 성경도 마찬가지다. 정의와 평화는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과연 교회와 사회 내에서 어떻게 공적신학을 추구할 수 있을까? 박성규 교수(장신대)는 우선 공적신학의 장애가 되고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와 사회 내에서 공적신학을 적절하게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교회와 사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요청하는 주제들과 과제들을 중심으로 공적신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장신대가 지난 4월 9일부터 10일까지 ‘각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공공신학하기’를 주제로 개최한 ‘2015년 한ㆍ중ㆍ미 국제학술대회’에 발제자로 참여해 ‘한국 교회와 사회 속의 공적신학의 가능성 모색’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개신교회의 사회적 봉사의 역할은 한국 사회 내에서 그 어떤 타종교, 타종파보다 더 크다는 것을 통계적인 수치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안에서 소위 오늘날 말하는 ‘공적신학’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그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공적신학의 기본정신이 요구하는 신학적이며, 구조적인 사회적 접근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인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이 한국 교회가 실제로 사회사업을 많이 해놓고도 동시에 사회로부터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유발하게 된 근본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정교분리 교회정책의 교의학적인 근거가 된 것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인 기독교 인간관,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인 신앙론,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이분법적인 구원관, 교회와 국가의 이원론적 교회론, 현실도피적인 종말론 등을 들 수 있다”고 피력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공적신학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까? ‘사실 공적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보편적인 정의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와 사회에만 적용되는 방법론을 찾는다는 것은 ‘공적신학’의 의미에 위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적신학은 사회현실의 현안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아래는 박성규 교수 ‘한국 교회와 사회 속의 공적신학의 가능성 모색’ 발표문에서 언급된 주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교회와 사회 속의 공적신학의 가능성 모색

2011년 밤베르크대학에서 독일의 대표적인 공적신학자 벧포르트-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은 자신의 고별강의에서 교회에서 공적신학의 목소리가 담당해야 할 차원을 네 가지로 분류해 정의한 바 있다.

첫째는 목회적 차원이며, 두 번째는 논증적 차원, 세 번째는 정치적 자문의 차원, 네 번째는 예언자적 차원이다. 이상과 같은 슈트롬이 제시하는 네 가지 차원을 중심으로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공적신학 담론의 가능성을 모색해봤다.

1. 목회적 차원

슈트롬에 따르면 목회적 차원에서의 공적신학의 목소리는 한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서구나 아시아 사회나 한 사회가 국가적 재난을 당하게 됐을 때, 교회 예배가 넘쳐나는 것은 공통된 현상이다.

한 사회가 대형 재난을 당하여 한계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목회적 차원의 공적신학 목소리를 할 말을 잃은 사회 속에 다시금 할 말을 되찾아 주고, 슬픔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교회가 공동체의 이름으로 한 공동체 사회 안에서 위로와 희망과 용기의 언어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은 개교회의 사적인 과제나 업무가 아니다. 이는 공적인 것이다. 교회나 교회의 대표자들의 이러한 일들은 사적인 영역을 넘어 한 사회의 대중에게까지 전달돼 공적인 영역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공적인 사업은 설교나 목소리뿐만 아니라 공적인 침묵 또는 공적인 촛불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공적인 행동과 실천은 언어적 수단보다 더 풍부한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돌이켜볼 때 안타까운 것은 교회와 신학이 공적신학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불의와 국가적 재난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목회적 차원의 공적기능도 사회에 넘겨주게 된 예들이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촛불집회’다.

‘촛불집회’는 단순히 문화적 행사의 차원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 특히 한국의 문화 속에서 촛불은 거룩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 안에서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고, 공적인 사회 속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를 전달하지 못하게 될 때, 세상은 촛불을 들고 세상의 언어로 사회적 불의와 국가적 재난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온 국민이 국민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교회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위로하고 치유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호 추모 관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노란색 리본’을 달거나 “미안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모방했을 뿐이다.

사회에서는 추모제를 지내며 국민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교회는 교회 문 뒤에서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만 위로하거나 그도 아니면 교회의 몇몇 대표자들이 유족들을 찾아 조문하며 위로하는 것으로 교회가 할 일을 다한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공공사회 전체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만한 설득력 있고, 미래대응력 있는 공적인 목소리는 전혀 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국의 교회와 신학은 세상의 언어와 소통하는 방법을 열어야 한다. ‘기도하라, 그리고 행동하라’는 개혁교회의 전통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공적신학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요소는 다름 아닌 목회자의 ‘공적 자아의식’의 결여다. 한국 교회 목사의 자의식에는 ‘공적인 직분’으로서의 자의식이 결핍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목사의 이러한 자의식은 결국 교회 안에서의 목사의 직분 자체를 사유화하게 만든다. 목사의 직분이 공직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목사는 사적인 종교적 직분이 아니다. 공적인 직분보다 더 공적인 직분이다.

목사직은 엄연한 ‘공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느 누구의 사적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로서 안수 받는 그 순간부터 목사는 모든 사적인 삶을 떠나 공적인 삶으로 들어간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 공적기능 수행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제자도의 길은 엄연한 공적인 직분이다. 사적으로 자신의 죽은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공직으로 부름을 받은 공적인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보다 더 급선무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제자도의 직분은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안위하여 제왕처럼 혹은 교황처럼 군림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받기 위하여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적 직분’으로서의 목회자 직분이 확립될 때, 비로고 교회와 교회의 대표자들은 공공사회 안에서 공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공공사회 속에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사회 안에서 촛불과 침묵행진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공적신학의 담론차원

슈트롬에 의하면 공적신학의 담론적 차원은 한 사회가 올바른 길을 찾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 내의 주요한 쟁점이나 논쟁이 일어날 때, 공적신학의 담론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발언이 공적신학의 담론적 차원의 신뢰와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노회와 총회가 공적논의의 장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노회와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들은 교회를 대표해 단순히 교회의 행정적, 정치적 회무만을 처리하라고 파송된 것만은 아니다. 총대들은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의 현안 문제들에 관해 함께 듣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신학적인 해답을 마련하고자 파송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회와 총회는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과 생태계 문제, 경제윤리, 사회정의등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현안문제들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전문가들을 초청해 함께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총회 차원에서 발표되는 성명서들도 반드시 공공의 합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를 대표하는 합의문의 성격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성명서들은 공적신학에서 강조하는 ‘세상의 언어’로 소통할 능력도 함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성명서들에 실리는 내용들은 설득력 있는 담론을 할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담론의 능력을 지닌 것이어야 하며, 인간과 사회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의 공적 발언들은 공적인 소통의 장으로 나가야 한다. 단순히 교계 신문이나 교단에서 제작한 방송으로 국한되어서는 사회적이며 공적인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따라서 총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발언들은 대중적인 언론들과도 소통해야 한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당시 새롭게 발견된 인쇄물을 활요하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회와 총회는 각 지역의 언론들과 대중매체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전달하는 사업의 파트너로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3. 공적신학의 정치적 자문 성격

공적신학이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때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은 기초적인 관계들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정치이념 등과 같은 사상적 당파주의로 인해 갈등과 분열의 살얼음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근래에는 정경유착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부를 가진 경제적 권력계층들이 대거 정치적 권력에까지 진입해 더 이상 경제정의나 소득분배 또는 힘의 균형적인 분배, 사회정의 등 수많은 사회윤리의 문제에 점점 더 접근이 용이하지 않게 됐다.

지금까지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상호 불간섭의 원칙과 국가가 자신의 권력유지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종교를 악용하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지속돼 왔다. 한국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속적인 관계이지 건강한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공적 발언이 국가의 정치와 정책에 자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회의 공적발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더욱 깨어있는 정신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독일의 경우 독일개신교연합총회(EKD) 산하에 정치적 자문역할을 감당하는 부서들을 두고, 그 부서들에서 정치현안들에 대한 공적인 입장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표명을 작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이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현안문제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할 전문적인 실력과 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 방향을 바로 잡고, 제시할 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업은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가장 의미 있게 상호 연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시찰회, 노회, 총회가 단순히 교회정치적인 문제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여왔다면 이제는 이러한 교회의 회의들이 사회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고 썩어진 곳을 정화할 전문적인 정치적 자문기구로 거듭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

노회나 총회가 각 부서의 부장과 전문위원들을 교회의 직위와 위치와 상관없이 정말 현실적으로 그러한 문제에 대응할 전문 인력으로 구성해 사회적 현안문제에 관한 정치적 자문역할을 실제적으로 하게 된다면 교회는 정치, 경제 등과 같은 문제에는 관여하지 말고 교회 일에만 국한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교회의 공식발언이 정치적 자문의 기능을 감당하는 정도에 따라 교회의 공식발언은 그야말로 사회의 공신력 있는 공적인 발언이 될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얼마나 신뢰하며, 동역자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 더 나은 길이다.

4. 공적신학의 예언자적 차원

공적신학의 예언자적 차원은 이미 구약성서에서부터 깊이 뿌리내린 전통이다. 불의의 현실에 대항해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게 함으로써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암 5:21~24).

한국사회에서 공적신학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공적신학이 감당해야 할 과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사실 현대에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거의 쇠태해버린 성서의 전통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예언자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 사실이다.

슈트롬은 공적신학이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요소를 언급했다. 첫째는 도덕적 문제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분명한 이유나 해결방안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문제 그 자체는 선명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예언자적 발언을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언자적 발언은 특별한 권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복합적으로 모인 공동체나 교회들은 자신들이 세운 지도자들에게 때때로 예언자적인 발언을 할 수 있도록 자유와 기회를 열어놓아야 한다. 그때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이 교회에 계승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예언자적 발언은 특별한 상황에 제한되어야 한다. 예언자적 발언은 미리 계획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예언자적 발언을 한다고 하지만 전혀 예언자적인 발언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전혀 예언자적인 발언을 할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넷째, 교회의 예언자적 발언은 담론을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담론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예언자적 발언도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예언자적 발언이 일반적인 비방과 다른 것은 그 예언자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그 예언자적 발언의 깊은 진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언자적 발언이라고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예언자적 발언은 우선은 근본적으로 철저히 비판적일 수 있으나 그것의 목표는 새로운 구성적 기획이어야 한다.

다섯째, 에언자적 발언은 겸손해야 한다. 예언자적 발언의 도덕적 의도가 발언자 자신을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알고, 비판을 받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언제나 틀렸다는 위험한 발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언자적 발언은 인내를 요구한다. 오히려 예언자적 발언을 하는 당사자는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설정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언자적 발언은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한 행동과 실천, 특히 예배, 디아코니아, 교육 등 더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행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어떻게 공적신학을 추구할 것인가?

교회와 국가 관계가 공신력 있는 공적인 관계로 형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교회가 공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까지도 개교회주의, 개인구원, 성령의 사유화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공적신학의 목소리를 낼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개교회주의의 배경에서 교회가 공적신학을 전개하게 될 때, 공적인 신학의 목소리가 얼마나 허망하게 될 것인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확하다.

한국 교회가 개혁교회의 유산을 이어받는데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개교회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개교회주의 구조가 낳은 가장 심각한 병폐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의 자의식이 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안에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결국 개교회주의에 갇혀 교회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기관들 가운데 가장 공적인 기관이다. 교회는 이 세상의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교회론에 있어서 불치병과 같이 자리 잡고 있는 오류는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종교개혁적인 교회론에 의하면 국가기관도 교회의 영적인 영역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통치영역을 지닌 엄연한 공적인 기관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글로벌 공동소유다. 교회가 철저히 근본에서부터 ‘하나님의 교회’이고자 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에서도 가장 ‘공적인 기관’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 교회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는 사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사유화되어버린 지금, 한국 교회는 공적인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이해도 공적인 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성령은 우선적으로 공동체의 영이며, 사회적인 영이며, 공적인 영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사회적 영’으로서의 성령, 우선적으로는 공동체의 영으로서의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인식 발견과 발전과 적용이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한국사회의 당파주의 또는 분리주의도 한국 교회가 사회의 미래적 대응능력을 위해 반드시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우선 과제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색당파로부터 시작해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해 굳어진 지연 또는 혈연주의와 학연주의는 만성적인 한국식의 만성질병이 됐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끝난 한국전쟁은 색깔론을 이데올로기로화하기에 충분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상위 1%와 그 외의 사람들로 나눠져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인간존엄을 파괴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소위 ‘갑의 행위’는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구조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다름을 강조하는 문화’가 너무도 깊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정신적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공적신학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공적신학의 관점에서 전개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정신일 것이다.

공적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은 상당부분 닿아있다. 공적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은 모두가 사회적 정의, 인권, 생태계 문제, 가난, 기아 등 사회적 문제에 신학적인 기여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에큐메니칼 신학은 일치를 추구하는 만큼이나 다름을 존중하는 신학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공적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개교회주의 극복,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 회복, 목회자들의 공적 직분의식 확립,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 회복, 교회와 신학의 책임적인 사회저적 담론 형성 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들이 극복된 후에 비로소 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 공적신학이 요청하는 제반 문제들에 관한 사회적 담론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3:34)는 말씀처럼 정의와 평화는 성서의 핵심주제이며,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에도 있음을 깊이 인식한다면 한국 교회와 사회 속에서 공적신학의 가능성은 정당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와 교회 속에서 복음의 실존적인 차원이 건강하게 자리잡으면서도 동시에 한국사회의 정의와 평화 회복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운동이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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