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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본회퍼에게 듣는다② “고통 왜곡하는 현실 권력 폭로하라”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5:25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 2015년 4월 15일 기사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한편,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한국 교회의 신학과 윤리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세월호 이후 한국 교회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발표된 연구논문의 일부를 '본회퍼에게 듣는다' 시리즈로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주>

“기독교윤리학은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 땅과 격리시켜 바라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곧은 정신이다.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고통을 왜곡하고 감추려는 현실의 권력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년이 지났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건의 진상, 진실을 둘러싼 인정투쟁 공방, 상반되는 애도와 냉소의 풍경들, 광화문과 안산, 팽목항을 향하는 분리된 시선과 분활된 전선들이 ‘고통’이라는 제목으로 세월호라는 캔버스에 고착돼 있다.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해석해야 할까?

본회퍼 신학의 주제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를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바로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면서까지 이 땅으로 내려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다.

본회퍼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신비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창조의 섭리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우리의 상상을 통해서 한 처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악과 고통의 문제가 지니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질문은 인간의 실존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지점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창조의 신비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고통을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신학적 해석과 결단과 행위의 차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본회퍼는 “신학적 질문은 악의 기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난 악의 극복을 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죄의 결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죄에 대한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와 세상과의 화해에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타락한 세계에서, 그리고 죽음을 향한 그의 타락한 질서 속에서-부활을 향해, 새로운 창조를 향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보존하시는 것이다”고 했다.

고통의 원인을 창조의 신비로부터 유추하려고 했던 본회퍼의 시도는 철저히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해석이었음을 ‘창조와 타락’은 보여준다. 그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대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

‘대리’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지칭하는 기독교의 특수용어다. 본회퍼에게 있어 대리 개념은 1941년 여름부터 1942년 초 사이에 쓰여진 ‘윤리학’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에게 있어서 윤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타자의 고통에 대한 대리적 죽음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철저히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했다. 이제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획득했다.

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 현재와 상관없는 미래에 존재하는 전적 타자가 아니라 세상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개방할 때, 비로소 신의 신다움이 정립된다.

‘대리’ 개념은 본회퍼의 교회론 ‘교회는 타자를 위해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는 고통의 짐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대리한다.

‘대리’의 결과 그리스도가 세상을 대신해 죽었고, ‘대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었듯이,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의 고통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의 대리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고통의 한 가운데 위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돕고 봉사하는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추상적인 논증에 기반한 교회가 아니라 구체적인 섬김의 실천에 있다. 교회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그 무게와 힘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 땅과 격리시켜 바라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곧은 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고통은 삶의 조건이고 양태다. 고통은 회피의 대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숭배와 신비의 대상도 아니다. 기독교윤리학은 이렇듯 고통에 대한 신화화와 탈역사화에 대해 저항하면서 고통을 왜곡하고 감추려는 현실의 권력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감싸고 있는 진실을 밝혀내고, 그 진실의 힘으로 현실의 고통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독교윤리의 현상학이다.

* 고통에 대한 윤리적 접근:레비나스와 본회퍼를 중심으로 / 이상철(한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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