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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에게 듣는다④ “교회 자리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본문

기독교 윤리

본회퍼에게 듣는다④ “교회 자리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5:27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 2015년 4월 15일 기사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한편,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한국 교회의 신학과 윤리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세월호 이후 한국 교회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발표된 연구논문의 일부를 '본회퍼에게 듣는다' 시리즈로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주>

세월호 참사는 분명 우리 이웃인 타인의 고통이다. 함께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 이웃의 고통이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한국 교회의 태도는 다양하다.

#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

첫째,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냉정한 태도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사회 내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꼭 불행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좋은 공부 기회로 여겨도 된다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수가 아니다 △특별법까지 만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등의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회 내에서도 또한 이렇게 생각하고 발언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게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발언이 있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주일예배 설교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세월호 참사가 하나님의 뜻이므로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타인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침묵’으로 보는 관망적 태도다. △불쌍하지, 그 어린 것들이 차가운 물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어. 자식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부모들 마음이 오죽할까. 그런데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가뜩이나 장사 안되던게 그 일 있고 나서는 바닥을 치고 … 뉴스 보기도 싫어 △세월호로 나라 전체가 멈춰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마무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등

참사는 안됐고, 아프지만 현실을 생각해서 일상으로 돌아가 민생을 돌보자는 태도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태도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전 마지막 단계로서 침묵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침묵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관망적 태도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는 주일설교를 통해 이같은 관망적 태도를 보였다. “왜 자꾸 남에게 책임 전가하십니까. … 선장 욕한다고 문제 해결 안됩니다. 카톡? 그만 하세요. 카톡 빨리 끊고 침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수록 입을 닫아야 합니다. … 함부로 남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범죄행위입니다. 카톡 그만 쓰시고 침묵하세요.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세요.…”

김동호 목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조용히 침묵하라”고 말함으로 한국 교회는 타인의 고통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읽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셋째, ‘하나님의 참여-고통’으로 보는 적극적 태도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만큼,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세월호 참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냉정하고 관망적인 태도와는 달리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이란 성명서와 세월호의 아픔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의 성명서인 ‘세월호의 아픔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의 호소문’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들의 태도는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기에 한국 교회는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 연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 본회퍼의 ‘타자 신학’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 내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를 다루기 위해서는 ‘타인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 여하가 타인에게 닥친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지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회퍼에게 있어 ‘나’는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 앞에 세워지는 존재다. 이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 앞에서 ‘나’의 인격은 형성된다.

본회퍼가 주장하는 바 ‘나’ 그리고 ‘나’의 인격이 세워지는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은 타자인 타인이다. 나에게 타인은 내가 존재하는 절대 이유다. 본회퍼는 타인을 위해 내가 결단하는 시간은 ‘하나님과 관련된 시간’이라고 주장함으로 타인은 나에게 절대적 존재임을 역설한다.

즉, 타인을 타자이신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 내가 타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임을 설명한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나는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타인을 책임져야 하는 윤리적 요구를 만나게 된다.

타인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 타인을 책임져야 하는 나, 이렇게 나를 관계/관리하시는 하나님 혹은 성령,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무심할 수 없는 나’에 대해 본회퍼는 설명한다.

본회퍼는 내가 타인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대리행위’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는 책임을 전제로 한 행위였고, 인간에 대한 책임이 대리행위를 일으킨 것이다. 이를 본받는 것이 모든 인간의 책임이고,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세상적) 사명이 된다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이다.

특히 본회퍼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희생까지 말한다. “대리와 책임은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내어줄 때에만 존재한다. 오직 자신을 버리는 자만이 책임적으로 살아간다. 다시 말하면, 오직 자신을 버리는 자만이 산다.”(‘윤리학’ 중에서).

# ‘타자 신학’을 통해 본 한국 교회의 3가지 죄

본회퍼의 ‘타자 신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태도 중 옳지 않은 태도를 죄로 규정한다면 한국 교회는 이기성의 죄, 책임전가의 죄,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꾸는 죄를 짓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기성의 죄’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해운회사, 해운회사를 감독 지도하는 기관, 정부 모두의 총체적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사고다.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저지른 범죄다. 더 나아가 국가범죄였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2014년 5월 20일 한기총 부회장이었던 조광작 목사의 발언(가난한 집 애들이 분에 맞지 않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처럼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다.

이웃의 아픔을 간과하지 말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태도다. 본회퍼는 우리가 “인간을 멸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인간 멸시로 인하여 우리는 바로 적의 최대 오류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조광작과 같은 이들의 태도는 본회퍼의 대리 개념에 준해 생각할 때 타인의 고통, 심지어 죄책을 위해서 기꺼이 대리적 수난을 자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본받아야 할 책임을 무시한 처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이기적 죄를 저지른 것이다.

둘째, 신정론으로 치부하는 ‘책임전가의 죄’다. 김삼환 목사의 발언이나 국무총리 후보였던 문창극 씨의 ‘하나님의 뜻’ 발언이 해당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이 인지하고 계시는 사건이 아닌 것은 없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해자의 폭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인지하신다는 의미이지 세월호를 대국민을 회개시키는 도화선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은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악용한 사악한 인간들의 잘못에 불과하다. 세월호 참사는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비도덕덕 양심과 행위의 악함의 문제이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세상의 불행, 모순, 악행까지도 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오용 혹은 남용이다.

자칫 교회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한 일 중의 하나는 세상의 불행과 악행을 하나님의 뜻으로 넘김으로써 교회는 지배자와 악마의 편에 서게 되는 일이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넘기는 신정론으로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

셋째, 무력함을 핑계 삼는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꾸는 죄’(침묵)다. 이찬수 목사나 김동호 목사의 발언은 타인의 고통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읽고 이해하는 태도로 인간의 무기력함을 전제로 삼는다.

물론 침묵이 소위 기독교 영성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침묵 속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선이 파멸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침묵하는 것은 죄가 된다. 본회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죄”라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그러므로 본회퍼가 볼 때, 하나님의 침묵을 들어 침묵하거나 무력함을 핑계 삼아 침묵하는 등의 태도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이해시키는 태도에 불과하다.

# 한국교회, 타자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본회퍼의 ‘타자 신학’에 입각해 한국 교회는 반성으로서의 대안이 필요하다. 책임을 진 자로서 한국 교회는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첫째, 경제지상주의를 고발해야 한다. 발전과 번영이 된 우리나라는 부정의(不正義)가 자연스럽다. 제노사이드(genocide)와 다르지 않게은 세월호 참사를 ‘경제가 불안해지니 이젠 그만 이야기하자’는 태도는 경제성장을 인권보다 우선시하는 태도로서 부정의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유의 사명 중 하나인 예언자적 외침을 회복해 한국사회를 망가뜨리는 부정의의 중심인 경제지상주의를 철페시켜야 한다. 성서에 2천 번 이상 반복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는 정의에 관한 명령은 경제지상주의 철폐 명령이다.

둘째,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맞이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로 세월호 참사를 읽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월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소망을 상실한 유가족으로 찾아오셨다.

세월호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삶의 지표를 상실한 생존자로 찾아오셨고, 세월호 참사와 연관된 사건들을 겪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국민들로 찾아오셨다. 고통당하는 자들의 곁에 있는 것은 연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본회퍼가 찾아낸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우선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개인적 차원이 아닌 집단적 차원에서 기억해야 한다. 부정의(不正義)에 저항하기 위해 집단기억으로서의 기록 작업은 기억의 정치를 이용해 악이 승리해 온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자 고통해결을 위한 적극적 작업이다.

공공적 영성도 회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 역할을 하기 위해 공공적 영성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더불어 사는 세상임을 놓쳐서는 안된다. 신정론으로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하다는 태도에 빼져서도 안된다.

본회퍼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드러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주변부의 인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리의 사명을 감당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도 나타나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읽고, 교회의 부흥으로 여기는 것은 신약성서의 초대교회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볼프는 지적한다. 교회의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정치적인 힘을 빌리는 우매함도 지적한다.

교회의 공공성은 익명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에 있다. 힘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고, 타자를 대리하시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아닌 유한성과 연약함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공적 참여가 문화의 모든 영역과 관련돼 있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하고 선을 찾아내는 것이지, 그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태도는 본회퍼가 지적한 바, ‘현실적합성’에 의한 책임한계에 비추어볼 때, 바르지 않다.,

교회의 공공성의 바람직한 태도는 ‘범위로는 전체적이지만 정도로는 제한적’임을 인정하는 것이 익명의 그리스도를 배운 자의 자세다. 그러나 생명으로 연대된 ‘나와 너’의 관계는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책임적 한계를 낳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의를 외치는 이들은 한국 교회를 향해 성장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오라고 요청한다. 한국 교회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단물을 먹지 말고, 권력의 횡포에 시달리는 주변부 사람들과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제 한국 교회의 자리는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나타나야 한다. 특히 힘이 없고, 돈이 없어 고통 받는 타인을 향한 대리행위가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 대리행위는 단순한 연민이 아닌 연대함이어야 한다. ‘그가 나’라는 책임이어야 한다.

이런 책임 하에 한국 교회가 세월호 참사로부터 받은 숙제는 '악의 평범성'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에 있다. 국가의 무책임으로 죽음 참사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으면서 참사의 은폐와 조작을 지시하는 국가와 권력의 명령에는 책임을 느끼는 이이히만과 같은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숙제다.

이 숙제는 정의로운 한국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를 통해 사건을 왜곡, 조작하는 국가와 그 국가의 명령에 움직이는 이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선을 찾고, 그 선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임적 행동은 철저히 익명에 의한 대리행위, 낮아짐의 대리행위여야 한다.

*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태도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반성-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 / 이동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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