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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칼빈의 교회개혁과 성령 본문

교리와 신학

[원문]칼빈의 교회개혁과 성령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5:48

 

이양호 박사(연세대) / 2015년 5월 3일 기사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이 지난 5월 1일(2015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교회개혁과 성령’을 주제로 제23회 영성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이날 발표된 세 편의 연구논문을 주최 측의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원문으로 제공합니다. 자료에 대한 모든 법적 권리는 제공자 측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칼빈의 교회개혁과 성령
/ 이양호 박사(연세대)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성령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워필드(Benjanin B. Warfield)는 칼빈을 무엇보다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죄와 은총에 대한 교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작되었고, 보상에 대한 교리가 안셀무스에게서 시작되었고, 이신득의론이 루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교리는 칼빈이 교회에 준 선물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고 위필드는 말했다. 또한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손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령론이 제자리에 왔다.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서보다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이 빛났으며,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누가 그보다 자기를 피로 산 구주에게 더 헌신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모든 사상을 특징짓는 것은 성령의 전능한 능력에 의한 구원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을 받을 만하다."
 


칼빈은 성령은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지만 교회 밖에서도 역사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의 일반 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경멸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리 자체를 거부하거나 진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든지 그것을 멸시하지 못할 것이다. . . . 시민적 질서와 규율을 매우 공정하게 확립한 고대 법률가들 위에 진리가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할 것인가?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바로 관찰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했는데 그들을 눈이 어둡다고 말할 것인가? . . . 아니다. 우리는 이들 주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작을 높이 찬양하지 않고 읽을 수 없다. . . .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것을 찬양할만하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워필드가 주장한 것처럼 칼빈 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은 창조 역사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속의 역사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성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준 분도 성령이요, 성서 독자들에게 성서를 깨닫게 하는 분도 성령이며, 성례를 통해 은총을 주는 분도 성령이다. 성령의 은밀한 활동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들을 향유하게 된다” 하고 칼빈은 말했다.

밀너(Benjamin Charles Milner, Jr.)는 『칼빈의 교회론』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는 “성령과 말씀의 절대적 상관관계”라고 말했다. 밀너는 성령과 말씀의 상관관계 속에서 창조 질서가 나타났으며, 인간의 타락에 의해 창조 질서가 붕괴된 후에 다시 성령과 말씀의 상관관계에 의해 창조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나는 강요 최종판의 구상 밑에 깔려 있는 것은 'duplex cognitio Domini'가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상관관계 속에 이루어진 질서, 즉 하나님 및 죄와 무관한 인간에 대한 교리를 다루며, 제2권 제1장에서 제5장까지는 타락에 의해 그 질서가 붕괴된 것에 대해 다루며, 제2권 제6장에서 제4권까지는 질서의 회복, 즉 말씀(제2권)이 성령(제3권)에 의해 외적 방편들(제4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다룬다."
 


그래서 밀너는 질서의 회복을 위한 제도인 교회는 칼빈 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이 이해는 . . . 칼빈의 교회론이 그의 신학 전반에 있어서 중심점이 됨을 확증해 준다. 교회는 세상에서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에 제4권만이 아니라 제2권 제6장에서 제4권까지가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제1권(질서에 대한 개념)과 제2권 제1장에서 제5장까지(질서의 붕괴)는 그것의 전제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에서 “교회의 정화는 성령에 의해 성취된다” 하고 말했다.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는 한 말라버리고 점점 타락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질 때 교회는 소생하고 마침내 힘을 얻는다. 단순히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놀랄 만큼 성장한다.” 밀너의 주장을 따르면,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개혁은 말씀과 성령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중세 교회의 제도와 관행에 대해 다각도로 비판했다. 우선 칼빈은 성직 매매가 횡행함을 비판했다.

"고대인들이 성직 매매(simony)에 대해 정의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교황 제도에 있어서는 성직 매매 없이 성직록이 부여되는 것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직록을 값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간접적인 천거가 없이 성직록을 받는 사람이 스물 중에 하나가 있다면 내게 말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지에 의해, 또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영향에 의해 성직록을 받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부에 의해 비위를 맞춘다. 요컨대, 성직록을 주는 목적은 교회들에 유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이다."
 


다음으로 칼빈은 교회의 세습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도 거의 못하는 어린아이 때에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성직을 유산으로 받기도 하며, 때로는 사생아 아들들이 아버지들에게서 받기도 한다.” “오늘날 영주들의 궁정에서는 세 개의 수도원장직과, 두 개의 주교직과, 하나의 대주교직을 가진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성직자가 교회를 양육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사를 파는 일만 한다고 비판했다.

“하루 하루 생활을 위해 고용된 용병 사제들은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무리처럼 이기적이고 창피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창녀처럼 자기 몸을 파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 . . 장로의 영예와 직책이 이 지경에 온 것이 교회에 얼마나 큰 수치인가를 내가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 . .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하고[. . .] 고대 교회법이 요구한 것처럼) 장로의 직책은 교회를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섬기는 것일진대, 단지 미사를 파는 일을 하고 삯을 받는 이 모든 사제들은 그 직분에서 낙제자일 뿐만 아니라 실천할 합법적인 직임도 없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곳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다스릴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요컨대, 그들은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단 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칼빈은 사제들의 도덕 수준이 매우 낮음을 비판했다.
 

"그들의 도덕을 본다면 어떠한가? 그리스도가 요구한 ‘세상의 빛’은 어디에 있는가? ‘땅의 소금’은 어디 있는가[마 5:14, 13]? 삶의 항구적인 표준이라고 할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무절제와 나약함과 방탕함 등, 온갖 종류의 정욕에 빠진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악명 높은 집단은 없다. 그들처럼 거짓과 사기와 반역과 배신에 더 능수능란한 집단은 없다. 나는 그들의 오만과 교만과 탐욕과 잔인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들의 삶 전체가 방탕한 데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 . . . 만약 그들의 행동을 고대의 교회법에 따라 판단한다면, 파문을 당하거나 적어도 직위로부터 박탈당하거나 하지 않을 주교가 거의 한 사람도 없고 교구 사제들은 백명 중에 한명도 없을 것이다.”
 


칼빈은 중세 교회의 집사직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집사들은 교회의 물질들을 나누어주는 가장 거룩한 직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주의자들은 그런 목적으로 집사들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집사들에게 제단에서 섬기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복음서를 노래하거나 다른 사소한 일들을 맡긴다. 구제품을 다루거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거나 이전에 그들이 수행한 전체 직능들은 전혀 없다.”
 

칼빈은 사제직 때문에 법정에 소송이 되는 것을 비판했다.

“오늘날 법정들은 다른 어떤 사건들보다도 사제직에 관한 소송 사건들로 넘치고 있다.”
 

이렇게 칼빈은 중세 교회의 제도와 관행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칼빈은 교회 개혁에 있어서 교회의 바른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교황 제도라든가 추기경, 대주교, 주교 제도 등은 비성서적이라고 보았다. 칼빈이 1541년 제네바 교회를 위해 작성한 교회 법규에서는 “우리 주님이 그의 교회의 통치를 위해 제정한 네 직임들이 있다. 첫째는 목사들이요, 그 다음은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장로들이요, 넷째는 집사들이다” 라고 말한다. 칼빈은 주로 성서 두 곳, 곧 에베소서 4:11과 로마서 12:7-8에 근거하여 이 네 직임을 추론해 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 교회의 통치를 주관하는 자들은 바울에 의해 첫째로 사도들, 다음으로 예언자들, 셋째로 복음전도자들, 넷째로 목사들, 마지막으로 교사들이라 불리운다[엡 4:11]. 이들 가운데 마지막 둘은 교회 안에서 일상적인 직임이다. 주님은 그의 왕국의 시작에서 처음의 세 직임을 세웠으며, 때때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그들을 일으킨다.

칼빈은 여기서 영구적인 직임과 일시적인 직임을 구별한다. 목사와 교사는 영구적인 직임이나 사도와 예언자와 복음 전도자는 일시적인 직임이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와 사도는 함께 묶을 수 있는데 그 둘은 목사에 상응하며, 예언자는 교사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성서에서 사용되는 'episcopus', 'presbyter', 'pastor', 'minister'는 동의어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을 감독들, 장로들, 목사들이라고 구별 없이 부른 것은 이 용어들을 혼용한 성서적 용법을 따른 것이다.” 칼빈은 바울이 디도서 1:5에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한 후 곧 1:7에서 “감독은. . .”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장로와 감독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용어로 보고 있다. 그리고 빌립보서 1:1에서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으며,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감독들이라고 부른[20:28] 예를 들고 있다.

그 다음에는 로마서 12:7-8과 고린도전서 12:28에 근거하여 교회 직임을 추론해 내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롬 12:7]와 고린도전서[고전 12:28]에서 그는 다른 직임들로서 권세, 치료의 은사, 해석, 통치,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열거한다. 이것들 가운데 일시적인 것들은 나는 생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다루느라 머무르는 것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중 둘은 영구적인 것들인데, 즉 통치와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칼빈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시적인 직임과 영구적인 직임을 구분하여, 두 직임을 영구적인 직임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장로와 집사이다.

교회의 네 번째 직임은 집사이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고대 교회에는 항상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불우한 자들을 위한 물질을 받아 나누어 주고 보관했는데, 매일의 구제금뿐만 아니라 재산, 세, 연금 등도 맡았다. 다른 하나는 병자들을 보살피고 간호하며 불우한 자들을 위한 구제품을 관리했다.” 칼빈은 로마서 12:8에서 집사의 이 직분을 추론해 낸다. 워커는 이처럼 초대교회의 집사 제도를 부활시킨 것을 칼빈의 위대한 업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평가는 적절하다고 하겠다. 중세기에 집사는 예배 의식을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했으나 칼빈은 환자와 불우한 자를 돌보아 주는 집사의 본래의 직능을 회복시켰다.

그 다음으로 칼빈은 성직자의 소명 의식을 강조했다. 교회 안에서 혼란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도 부름이 없이는 성직을 맡을 수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부름에는 두 가지, 즉 내적 부름과 외적 부름이 있다. 내적 부름은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하는 것으로 본인 이외에 아무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교회를 세우려는 욕구가 있는지를 봄으로써 그의 내적 부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외적 부름은 교회가 목사로 부르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즉, 건전한 교리와 거룩한 삶을 구비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을 목사로 뽑는 데 있어서 교인들의 동의를 받을 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 전체 교회가 뽑는 방법, 동료 목사들과 장로들이 뽑는 방법, 한 개인이 뽑는 방법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방법들 중 칼빈은 “적합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교인들의 동의와 찬성에 의해 선임될 때 우리는 목사의 이 부름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정치에 있어서 칼빈의 민주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첨가하여 그는 대중의 나약함 때문에, 혹은 악한 의도 때문에, 혹은 무질서 때문에 잘못되지 않기 위해 다른 목사들이 선거를 관장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칼빈은 교회 정치의 민주적인 방법을 주장하면서 민주적인 방법이 선동에 의해 오도될까 하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권위에 관해 칼빈은 교회 안에 교리를 제정할 권한, 교회법을 만들 권한, 교인들을 치리하는 권한 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자의적으로 이런 것들을 제정했다고 비판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제8장에서 제12장까지 교회의 권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권위는 독자적인 권위가 아니라 성서에 의존한 권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며, 말하자면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교회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는가? 왜냐하면 교회가 주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칼빈은 말한다.

교회의 권한은 일부는 감독들에게 일부는 지역 교회 회의나 세계 교회 회의에 있다. 그런데 교회의 이 권한은 영적인 권한이다. 교직자들에게 교회의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에 주어진 것이다. 환언하면 그들에게 맡겨진 말씀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교직자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라고 할 수 있다. 교회 회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회의는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척도에 따라 검토해서 성서에 부합할 때만 권위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판단의 모든 기회 밖에 두며 총회들과 교부들은 말씀의 규범에 일치할 때에 확실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권위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쟁점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둠으로써 성서적 근거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칼빈은 성서의 권위를 최우위에 두었으며 감독이나 지방 교회 회의나 세계 교회 회의의 결정은 성서에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를 성서의 권위에 종속시켰다.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의 권위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즉, 교의들을 작성하는 권위와 그것들을 해석하는 권위이다. 교회가 이런 권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새로운 교리를 주조하는 것, 즉, 주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한 것 이외 다른 신탁을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이 영적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교사가 되기 위해 새 교리를 제시하는 능력을 사람에게서 박탈한다.” 칼빈은 성서를 기록한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 사이를 이렇게 구별하고 있다. “저자는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비서들이며 그러므로 그들의 문서들은 하나님의 신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성서에 의해 제시되고 확인된 것을 가르치는 것 이외 다른 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 신실한 사역자들은 새로운 교리를 주조하는 것을 허락받지 않고 있으며, 다만 하나님이 준 교리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새로운 교리를 주조하는 것은 개인에게만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교회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적 총회라 할지라도 성서의 권위에 의존해 있다. “총회들은 그것들에 합당한 위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성서가 더 높은 위치에서 뛰어나며 그 표준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없다.” 칼빈은 세계적 총회들 가운데 니캐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총회 등은 성서에 대한 “순수하고 본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중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두 번째 권한은 입법권이다. 모든 인간 사회에 있어서 공동의 평화를 이룩하고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 나아가서 인간의 업무들에 있어서 어떤 절차가 항상 효과적인데 그것은 공적 품위와 그리고 인간성 자체의 유익을 위해 존경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특히 교회들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교회들은 모든 것이 잘 조직된 제도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잘 유지되며, 화합이 없이는 절대적으로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도 칼빈의 대전제가 빠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적 법규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 즉, 성서에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규들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양심을 속박하는 법규들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칼빈은 입법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를 강조한다. “무엇이 해치고 무엇이 건설한다는 것을 사랑이 가장 잘 판단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으로 하여금 우리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모든 것이 안전할 것이다.”

교회의 세 번째 권한은 사법권이다. “어떤 도시나 어떤 지방도 치안관과 정치 조직이 없이 지속될 수 없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 . . 영적인 정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처음부터 법정을 두어 도덕적 문제에 대해 견책하고 악덕을 조사하고 ‘열쇠의 직임’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권한을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에게 주었으며, 사람들을 그의 말씀의 사역자들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교회의 사법권과 세속 정부의 사법권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사법권을 혼돈하여 세상 정부의 치안관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 교회의 법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권력과 세속의 권력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와 상위성이 있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치안관과는 달리 형벌하거나 투옥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의 최종적 무기는 파문일 뿐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회의 독자적인 파문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며, 마침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그 노력이 성취되게 되었다.
성례에 관해 칼빈은 중세 교회의 칠 성례에 대해 비판하고 올바른 성례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중세 교회의 칠 성례 가운데 두 개의 성례, 즉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했다.

성찬론에 있어서 칼빈은 중세 교회의 화체설을 비판했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몸이 빵과 포도주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듯이 그리스도의 살은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음료이다. 그래서 성례는 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유비이다. 그래서 칼빈은 중세 교회의 화체설을 이렇게 비판한다. 만약 성찬에서 실체가 변화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빵과 참된 포도주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것에 대한 유비라는 성례의 본래적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중세 교회의 사효론에 대해 비판했다. “궤변가들이 opus operatum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거짓일 뿐이며 성례의 본질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opus operatum이라는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찬에 있어서 신앙을 강조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성례들은 치명적인 죄의 장벽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 . .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신앙은 조금도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한다면 그의 몸과 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들은 성례에 대해 주술적인 힘을 부여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칼빈은 중세 교회의 성찬론을 우상 숭배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신을 만들었다. 선물들을 주는 분 대신에 선물들을 예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 숭배인가? 이 안에는 이중적인 범죄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취한 영예를 피조물에게 줄 뿐만 아니라[. . .], 그의 거룩한 성례를 혐오스러운 우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선물들을 더럽히고 타락시킴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되었다.”

교회의 재정 문제에 관해 칼빈은 성직자들이 교회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비판했다.

“주교와 수도원장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예산의 대부분을 얼마나 신실하게 처리하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질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검약과 소박함과 절제와 겸손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고용인의 수와 화려한 건물과 우아한 의복과 잔치들에 있어서 제후들의 장엄함과 경쟁하는 것이 적절한가?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고, 소박한 음식물로 만족하라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범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 .] 촌락들과 성채들을 점유할 뿐 아니라 넓은 주들을 차지하고 마침내 전체 왕국들까지 차지하니 그들의 직무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고대 교회 회의들에서 감독은 자기 교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값싼 음식물과 가구들을 가지라고 한 명령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주님의 사제들은 가난한 것이 영광이라고 한 아퀼레이아 교회 회의의 선언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 . . . 제롬은 곧 첨언하기를 감독의 영광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며, 모든 사제들의 수치는 자신들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헌금은 고대 교회의 관례에 따라 4등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법들에는 교회의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교직자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는 교회 및 다른 건물들의 보수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나그네나 가난한 본토민들을 위해서였다. 다른 교회법들은 마지막 것을 감독에게 할당했는데 이것은 내가 방금 말한 구분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 법들이 그것을 감독 혼자 다 쓰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다 주거나 할 수 있는 감독의 사적 수입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칼빈이 “적어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고대 교회에서는 재난 때문에 긴급한 구제가 필요한 때는 그 절반 이외에도 교회의 기물을 팔아서 구제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아카키우스 감독은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 하나님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 때문에 잔이나 컵이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교회의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사 준 예를 들고 있으며, 또 암브로시우스가 교회의 거룩한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아리우스파에서 보고 비난했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간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이어서 칼빈은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곤궁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제네바에서는 집사들이 구빈원 원장직을 맡았으며, 그들은 교회 헌금 외에도 시당국이 배정해 주는 예산, 벌금, 기부금, 자선을 위해 헌납된 물건을 판매한 대금 등의 수입원으로 구제 활동을 해 나갔다.
 
밀너가 말한 것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상관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말씀과 성령이 상호 작용할 때 새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회 개혁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근거해서 진행해 갈 때 참된 개혁이 되는 것이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와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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