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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표절진단-하>타인의 설교 참고가 모두 ‘설교표절’은 아냐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8:11

설교표절, 그 정죄의 기준은 무엇인가? / 서문강 목사(중심교회)

데오스앤로고스  |  thelogos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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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28  17: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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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꼭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설교만이 참 설교’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자기보다 더 나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나름으로 소화해서 성도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양심적인 처사이다. 그것은 표절이 아니다.”

“진리는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 자신이나 그 회중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공유(共有)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조명을 얻고 은혜를 받았다면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에게 그것을 나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에서 남의 설교를 자료로 삼았다면 그것을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

“설교 표절 여부는 설교자의 소명과 설교관, 설교 방식과 설교자의 삶의 실제나 자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청어람ARMC 등 4개 단체가 지난 27일 개최한 ‘표절과 한국 교회 포럼’의 설교 부분에서 발표한 서문강 목사(중심교회)는 “설교자가 한 편의 설교를 하기 위해 자기에게 그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 있으면 분명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를 다시 새롭게 세우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하나님 앞에서 ‘본문 말씀과의 씨름과 묵상과 기도, 자기 회중에 대한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진단, 설교자로서의 사유의 과정을 거치고 두려운 마음으로 설교할 내용을 작성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 내용을 두렵고 떨림으로 증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이와 같은 설교자 의식과 실천이 없으면 그 설교는 ‘표절’이 아니어도 표절과 같이 가치가 없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나의 설교’를 참조했다 할지라도 위에서 말한 참 설교자의 소임을 더 잘하기 위한 과정 중의 부분이었다면 설교 표절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타인의 설교를 참조해 자기 설교에 어떻게 활용하느냐 따라서 표절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서문 목사의 설교 표절과 관련된 이해는 하단의 정리된 발표내용을 참고하면 된다).

서문 목사는 “우리 설교자들은 각자 하나님께 받은 설교자로서의 보편적 소명이 있다”며 “하나님께서 주신 개별성, 곧 ‘나와 같은 설교자’는 ‘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주신 은혜와 은사, 소양을 따라서 ‘나에게 맡겨진 회중 앞에 나의 설교’를 해야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런 과정 중에서 설교자와 회중 모두 바르고 견실하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이런 과정 속에서 그 설교자의 설교는 더욱 더 깊어지고 순전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설교 표절, 그 정죄(定罪)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발표한 서문강 목사의 주요 발표내용을 정리했다.

   
▲ 서문강 목사(중심교회)
# 표절 설교와 독창 설교(창작설교)의 차이


표절 설교인지, 독창 설교인지 분별할 수 있는 척도는 곧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자기가 할 설교의 소임을 위해서 남의 것을 베끼거나 도용하여 회중들 앞에 가지고 나가서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곧 설교 준비를 위해서 쏟아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나 수고 없이 그대로 회중 앞에 나가서 마치 자기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맺히고 익힌 열매를 준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행위가 ‘표절 설교’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나름으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하여’ 회중 앞에 가지고 나가면 그것은 ‘독창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주어진 예배에 설교할 소임을 받고 그 설교를 위해서 자신이 직접 그 설교할 것을 준비하고 원고나 내용을 작성하거나 정리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일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의 메시지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 메시지를 받을 회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미리 내다보거나 점검해 보는 것이 수반되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설교할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할 회중의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자 자신의 영적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등, 소위 설교안(說敎案)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보일락 말락 ‘흙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나오는 작고 여리고 노란 떡잎’ 같이 나타나기부터 강단에 서기 전 그의 손에 들려진 ‘설교 원고’로 완성되기까지의, ‘진을 빼는 해산의 수고(말씀 해석과 묵상과 기도를 수반한),’ 또 그 설교내용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증거할 때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간절한(마음 상할 정도의) 기대와 부담 등,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바르게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얼마나 진을 빼는 고투가 있어야 하는가. ‘표절 설교’는 그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러한 과정을 겪은 것 같은 ‘가면(假面)’을 쓰고 행해지는 것이다.

# 하나님 지혜의 방식으로서의 설교와 설교자의 위치에서 본 표절의 심각성

설교는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에게 전달이 되고 회중들은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의 인격 속으로 전이(轉移)되고, 그 하나님의 진리가 그 회중들 각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개인 전도에도 적용될 수도 있으나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설교의 미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인 ‘설교’라는 제도는 반드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은혜와 진리 속에서 먹고 자라고 회중들도 함께 자란다.

설교자도 자기가 전하는 진리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진리를 회중들이 듣고 받고 그 인격들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를 받듯이 회중 보다 먼저 자기 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거룩한 지혜의 소산이다.

설교자와 회중 모두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고 설교자로 부르시고 설교자로서 가져야 할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결국 표절 설교의 문제점은 남의 설교를 자기 설교인양 하는 부도덕한 행위로 대번에 정죄당할 만한 것 외에 또 더 심각한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사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기르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 과정’을 빼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도 진리 속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다. ‘표절 설교’를 하는 이는 그 설교되는 진리를 먹고 묵상하고 자기 것으로 받고 순종하는 삶이 열려질리 만무하다. 삶도 표절하는 것 같이 그러할 것이니 말이다.

곧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역사하고 작용하여 그 인격을 진리에 걸맞게 준비시키고 변화시키는 과정이 전혀 없이,’ 진리에 걸맞지 않는 부도덕한 양심을 ‘통로로’ 회중들에게 설교안이 전달되니 참으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 설교자들의 준비가 부실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설교할 당시 은혜를 주시기도 하신다. 모든 생각 있는 설교자들은 그것을 체험했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먹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비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할 뿐이다.

설교자의 인격의 수준만큼만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회중들이 언제 은혜를 받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이다. 그 일에 우리 부족한 사람들을 설교자로 부르시어 쓰시는 것이다.

그렇게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역량대로 설교자의 임무를 감당하는 자와, ‘표절’이라는 편이한 방식을 채용하여 쉽게 설교사역을 해나가는 설교자의 사이를 하나님은 반드시 구별하신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 표절의 시험에 빠지는 원인

첫째, 표절의 시험은 본질적으로 ‘설교의 본질과 설교자로서 자기가 받은 소명의 막중함과 영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거의 없거나, 설교의 대 주제인 ’성경의 복음‘의 필요성과 긴박성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온다.

소명이 없는 자가 ‘설교를 해야 하는 것 같은 고역’(苦役)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서양 속담에 남을 정말 지독하게 욕하는 말 중에 ‘은혜(소명)없이 목회나 하라’는 말이 있다. 정말 ‘소명 없이 목회한다, 소명 없이 설교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지겨운 임무’일 것이다.

반면에 소명을 받은 설교자에게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 하던 로이드 존스 목사의 그 눈부신 빛난 면류관과 같은 진술이 생각난다.

소명이 없다면 은사도 주어지지 않는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직임에 합당하게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2:11-12). 설교자는 정말 설교자로서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사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은사를 더 예리하고 풍성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설교자로서의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소명자라 할지라도 꾸준한 설교자로서의 묵상과 연구 및 사유의 과정이 무시될 때 설교 표절의 시험에 빠진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에 비추어 인생과 사물을 묵상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것이 설교자의 생각과 의식과 생활 속에서 계속 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고된 공부’를 통해서만 설교가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 고된 공부는 단순하게 책만 갖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연구와 묵상을 겸비하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피나는 연구, 기도와 묵상, 회중들이 살고 있는 세대를 통찰하기 위한 집요한 독서와 사유를 통해 참 설교가 나올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설교자들과 교통을 갖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증거할 메시지를 제시하고, 설교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영감)을 메시지에서 감지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각 설교자에게 주신 개성의 중요성을 무시할 때 설교 표절의 시험에 빠진다.

설교자 각자는 ‘나라는 설교자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다. 자기 얼굴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내 얼굴 같이 지으신 경우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개성을 견지하기를 원해야 한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의 원고 그대로 베껴서 설교하는 것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듣기로 어떤 사람이 회중들이 자기 설교에 불평하기에 작심하고 대설교가 한경직 목사의 설교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설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인들이 ‘그렇게 훌륭한 설교를 하시다니요’라고 칭찬할 줄 알았는데, ‘우리 목사님은 갈수록 더 유치한 설교를 한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가 설교할 때에는 그 메시지가 정말 회중들에게 감동적으로 받아드려졌는데, 다른 목사가 그 원고 가지고 하니 내용도 없고 빈약하고 유치한 설교로 둔갑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한경직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 그 진리가 증거될 때에는 그 진리를 위해서 준비된 그 인격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생명력 있게 전달이 되었지만, 전혀 그 진리를 위해서 준비되지 않은 다른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는 그 진리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성령께서 그 설교를 할 때 역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 설교자마다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다. 한경직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 설교자들 모두는 더 잘 하려거나 더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내가 아니고 남이 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설교의 효과를 내려거나 성공지향적인 야심이 생길 때 설교 표절의 시험에 빠진다.

보편적으로 ‘표절 설교’의 대상은 소위 ‘유명한’ 설교자, ‘큰 교회’ 설교자, 소위 성공한 목회를 하였다는 자들의 설교이기 십상이다. ‘그러한 이들의 설교에는 다른 설교자들의 것과는 다른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 교회에 적용하게 되면 무엇인가 그 교회에서와 같은 효과가 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시험을 받게 될 때에 표절의 유혹을 받게 된다.

큰 교회, 많이 모이는 교회, 소위 감동적이어서 듣는 이들을 많이 둔 설교자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나 신실하고 바른 설교로 목회를 하는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이름과 나라를 위해서 영광을 나태내시고 쓰시는 것이다.

설교자가 이러한 소신이 없을 때 ‘표절의 시험자’가 그 설교자의 현관을 넘어 안방 문을 열려고 하는 셈이다. 남의 설교를 흉내 내거나 아예 표절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다양하게 만드신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 야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세우신 조화와 아름다움을 깨는 불손이다.

다섯째, 말씀과 기도하는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일로 부산할 때, 설교 표절의 시험에 빠진다.

말씀과 기도를 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이 설교자의 본무요 설교자의 본영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다른 일로 분주하게 되면 설교를 위한 정당한 시간이나 묵상이나 연구나 사유나 기도가 그만큼 줄어들고 나중에는 허겁지겁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를 해야겠으니 ‘표절의 마수(魔
手)’에 걸려들게 된다.
사도들은 이미 초기에 그 사실을 감지하여 조치했던 것이다(행 6:1-6). 그러니 설교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을 빼고 나서 다른 일을 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표절 설교’의 함정에 발을 이미 들여 놓은 셈이다.

그러니 설교자 자신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그렇게 목회자의 시간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 설교자가 그런 규례를 따라서 일하면 성도들도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나 설교자가 다른 일에 분주하게 뛰어 다니면 사역의 중심이 거기에 있는 줄로 안다. 그래서 설교자가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설교준비에 쏟을 시간들을 제 멋대로 빼앗아 간다. 그런 설교자는 허둥지둥 궁여지책으로 ‘표절의 마수’와 손을 잡는다.

# 표절 방지를 위해 남의 설교는 참조하지 말아야 하는가?

남의 설교를 참조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서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설교자도 혼자서 훌륭한 설교자로 자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로 소명을 받았다 할지라도 실제 설교 사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남이 한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것이 없이 바른 설교자로 세움 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로 소명 받은 이들을 연단하시고 양육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쓰신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신실하게 소명을 감당한 설교자들의 자서전적인 진술들을 보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앞선 설교자’가 반드시 있었다.

곧 그 설교자로 하여금 설교하는 것의 본질과 영광과 실제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배 또는, 선진, 또는 동료 설교자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영향의 정도가 큰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지만 모든 설교자마다 자기에게 영향을 끼친 설교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말은 모든 설교자마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거나 읽는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로 자라게 된다는 말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통해서 당신의 설교자들을 자라게 하시고 연단하시는 방식을 쓰신다는 의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같은 대 설교가도 그의 스승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 존 오웬(John Owen)과 같은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스펄전(C. H. Spurgeon), 라일(J. C. Ryle)과 같은 그의 ‘설교학 멘토’들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로 사역하고 섬기는 과정에 있는 우리 모든 설교자들은 ‘다른 이들의 설교를 듣고 참조하는 습관을 견지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되어 가장 잘 빠지는 함정은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 귀를 닫아 버리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설교를 하려고만 하지 ‘설교를 듣는 일은 완전하게 멈추어 버린 병폐’에 빠지게 된다.

남의 설교를 전혀 듣지도 않고 참조하지도 않고 소위 ‘독창적 설교의 골방’ 속에 갇혀 있는 설교자의 설교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선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더 풍성하였을 것이 빈약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어떤 목적으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참조해 자기 설교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표절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가 남의 설교를 부지런히 참조하고, 듣기도 좋아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그런 일을 통해서 직접 은혜를 받고, 한 신자로서 자기의 영성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복음의 은혜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설교자로서의 소명의식과 설교자로서의 사고방식과 관점과 센스를 위해서 그리한다 하자. 그러면 그는 분명 표절 설교자가 아니고 설교자로서 아주 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27:17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한 것 같이, 다른 이의 설교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를 바르게 자극하고 설교자로서의 영감에 있어서 큰 진보를 가져온다.

정말 설교자들이 이러한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매주일 다른 이들의 설교를 받아 보고 듣고 읽고 하는 설교자들이 있다면 그 설교자는 표절 설교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맡기신 설교 사역을 위해서 성실하고 신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장할만한 일이다.

또 어떤 다른 이의 설교를 듣거나 읽고 설교자 자신이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본문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한 조명을 얻었고 또 자기 회중들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것이 ‘남의 설교이니 나 혼자만 은혜 받고 말지’ 하는 식으로 하고 자기 설교에 전혀 반영하지 않는 목사가 잘하는 것인가? ‘표절의 유혹이나 시험에 빠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는 설교자로서의 모자란 지각을 소유한 자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더 설교의 더 큰 전제와 원리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곧 설교는 누가 하였다 할지라도 그 증거된 진리는 결국은 목자장 되시고 모든 설교자의 설교자 되시는 주님의 것이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잠12:11). 그러니 누가 증거하였다 할지라도 바른 말씀 증거라면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듣고 취할 책임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고 완전한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골1:28).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그 목적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골1:29). 곧 우리의 설교의 목적은 그 자체에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광포하시고 나타내시는 통로요 방편이다.

그러니 진리는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 자신이나 그 회중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공유(共有)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조명을 얻고 은혜를 받았다면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에게 그것을 나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에서 남의 설교를 자료로 삼았다면 그것을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럴 경우 그 설교의 기본 자료의 원천을 밝혀야 할지 그렇지 않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 날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만일 어떤 남의 설교의 진술을 그대로 따와서 쓸 경우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내가 아닌 모 설교자의 설교 속에서 나온 말이라’고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의 포인트는 같기는 하지만 나름으로 그 설교자가 본문을 다시 더 묵상하고 설교자로서 자기 회중의 영성을 그 말씀에 비추어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그 설교 스타일이 그 설교자 자신의 방식과 전달 방식으로 재정돈이 되었다면 그 설교의 포인트에 대한 원천을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미세한 것을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의 양심에 맡길 일이다. 어떤 경우는 분명 어떤 설교자의 증거를 통해서 들은 말인데, 그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의 이야기였는데, 그 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내용만은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꼭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설교만이 참 설교’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자기보다 더 나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나름으로 소화해서 성도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양심적인 처사이다. 그것은 표절이 아니다.

교묘한 짜깁기는 표절 중에 가장 악한 형태이다. 그대로 남의 설교 전체를 통째로 가져다 쓰면서 자기 설교인양 하지는 않지만, 온통 설교 준비를 남의 설교만 뒤지고 다니다 만난 자료들을 뽑아 짜깁기를 하여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설교 자료가 궁하다 하면서 주일에 설교한 것들을 서로 바꾸어 나누어 가지고 서로 바꾸어 설교를 한다고 하자. 그것도 표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가 자기 나름으로 연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회중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일에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남의 해 놓은 것만 취하고 혼합하여 내놓는다면 그것은 표절이 되는 것이다.

같은 진리라도 교회마다 상황이 달라서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적용과 강조는 달라질 수 있어서 각 회중의 스승으로 세운 설교자는 자기의 소임을 위해서 자기 교회에 필요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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