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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부흥에 기여했던 주요 인물들은 누구일까? 본문

역사와 신학

한국성결교회 부흥에 기여했던 주요 인물들은 누구일까?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8:27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지난 25일 ‘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특별 학술세미나’ 개최 / 2015년 11월 26일 기사

 

<정빈>, <김상준>, <이명직>, <최석모>, <이성봉>, <김응조> 등.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성결교회 부흥에 기여했던 주요 인물들이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 11월 25일(수) 오후 1시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특별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동 연구소는 “한국성결교회를 위해 기여했던 주요 인물들을 연구해 성결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고, 미래 성결교회를 설계하는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고 설명했다. 이날 발표된 인물들에 관한 연구 내용을 일부 정리했다. <편집자 주>

 

 

 

< 아래 인물 이름 옆에 게재된 연도는 성서학원 및 신학교 수학기간을 의미함>

 

1. 정빈(1905~1907) / 성결교회 창립 맴버

 

정빈은 성결교회 창립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선행연구는 미비하다. 그는 1870년대 초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정빈은 동아기독교회(현 기독교한국침례회 전신)의 회원이 되어 활발한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북만주 간도의 용정교회를 책임지고 시무했으며, 동시에 만주 종성동에 세워진 종성동 성경학원에서 교수로 가르치는 일도 병행했다.

 

정빈은 특정한 교파의식을 갖지 않았다. 일본에서 실습했던 방식대로 악대와 가두전도 연설, 호별 방문을 하며 복음을 전해 결신시키고, 결신자들은 가까운 교파 교회로 인도해주었다.

 

정빈은 성결교회 창립자라는 중요성에 비길만한 사상이 담긴 방대한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신학적 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은 사실 ‘태극학보’(4호, 1906년 11월 24일자)에 실린 ‘면면(面面) 그리스도’ 뿐이다. 이 글은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정빈은 사중복음의 강조, 복음전도 우선주의, 개화사상을 추구했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적 사상은 아닐지라도 성경, 복음, 죄, 자유 등의 말은 많지 않은 그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

 

비록 그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지만 정빈은 성결교회 초대교역자였으며, 서울신대의 전신인 성서학원의 최초의 교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 발표: 정병식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2. 김상준(1905-1907) / 성결교회 창립 맴버

 

김상준 목사는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목회자이며, 전도자, 교육자, 신학자였다.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하며 획득한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신학적 전통에 충실하면서 그 신학을 한국성결교회에 소개하고,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표명하고 있으며, 그의 성결론은 부패성의 죄거, 순간적 성화 등을 강조하는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성결론을 이어받았고, 신유론은 질변이 죄에 기인한 것으로 보면서 죄의 회개와 그 죄를 사하심으로 질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남을 말했다.

 

김상준 목사는 성결교회 초석이다. 그는 공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복음전도와 후학 양성, 그리고 성결교회 신학 정립에 관심을 두었다. 김상준 목사는 초기 성결교회 역사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려 성결교회 최초의 복음전도관을 세웠다. 물질과 명예 모두에 초연했다. 김상준 목사는 성결교회의 원조이며, 성결교회 신앙의 원조, 성결교회 교리의 원조, 성결교회 헌신의 원조라고 불릴만 하다. / 발표: 박찬희 박사(서울신대 외래강사, 교회사)

 

3. 이명직(1909-1911) / 성결교회 사부

 

동양선교회가 한국에서 사역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이명직 목사다.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한국교회 최고 중요한 자리인 이사직에 선임됐다. ‘활천’을 창간하고, 헌법을 만들었으며, 성결교회 약사를 편찬했다. 한국인으로서 성서학원의 초대원장을 지냈고, 성결교회 연회, 총회 등 모든 중요한 직책을 감당했다.

 

만일 동양선교회가 이명직이라는 지도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결교회는 존재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명직 목사는 처음부터 한국 교회는 한국인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은 한국 교회가 동양선교회의 정신을 잘 알고, 아울러서 자립의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명직은 동양선교회의 정신을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결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한국 교회가 경제적인 자립을 해야 자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성격, 즉 신앙의 부흥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1930년대 한국 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너무나 어려웠다. 결국 이명직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좋았지만 그의 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 발표: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4. 최석모(1912-1915) / OMS 한국본부 이사

 

최석모 목사는 한국성결교회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탁월한 행정가요 교단 지도자이며, 뜨거운 영혼구원의 소명을 가진 복음전도자, 사랑을 실천하는 성결한 목회자로 부를 수 있다.

 

초기 성결교회 지도자로서 이명직 목사와 함께 손발을 맞추어 일하던 교단의 핵심인물 가운데 첫째였다. 한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다.

 

그의 리더십은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통역으로 임명되면서 세워지고 빛나게 됐다. 성결교회 모든 통역을 도맡아 할 정도로 한국 교회에서 명성이 높은 설교통역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교단의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해외를 떠도는 동포들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복음으로 치유하려던 복음전도자였으며, 영혼을 맡은 목회자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사랑을 실천하던 성결한 목회자였다. / 발표: 박문수 박사(목회신학연구원 원감)

 

5. 김응조(1917-1920) / 성결교 신학교(성결대) 초대학장

 

김응조는 목회자이며, 부흥사, 신학자임과 동시에 방대한 양의 글을 쓴 저술가였다. 그의 저술들은 성결교회가 자유주의나 세속주의에 어떻게 저항해 왔는가에 대한 사건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는 중생과 성결과 신유와 재림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에 해당하는 체험적 신앙을 가진 독특한 신학자로서 사중복음 은혜 체험에 관한 가장 풍요롭고도 복음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크게 무장된 김응조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1931년에는 호남지방 감리목사, 1936년에는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활동했으며,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했다.

 

독립전도자이며 초교파적인 부흥사로서 활동에 들어간 김응조는 ‘생명지광’(生命之光)이라는 전도지를 만들어 각지에 보급했다. 이 잡지는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도 애독되면서 일제 아래 시련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해방 이후 1956년 성결교회 총회장으로 피선돼 ‘정화와 부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교단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성서적 정통신학’을 비롯해 여러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하면서 부흥사와 저술가로 활동했따.

 

김응조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교단 분열의 고통 속에서 교단 공식 신학교였던 서울신학교가 기성 측에 남게 되자 예성 측은 성결교회 본래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고수하고, 신학과 신앙의 세속화를 방지할 교회 지도자를 양육할 신학교 건립에 대한 절박성을 갖게 됐다.

 

1962년 9월 20일 김응조의 사택에서 50명의 입학생을 받아서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했다. 성결교신학교는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노선에 근거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전통과 웨슬리안-알미니안주의의 신학교리를 학교 이념으로 했다. 성결교 신학교의 명예교장으로 이명직, 초대 교장으로 김응조가 취임했다. / 발표:배본철 박사(성결대, 교회사)

 

6. 이건(1922-1925) / 경성성서학원 신약학 교수

 

이건 목사는 한국 성결교회 초창기 목회자, 선교사,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결교회 선구자다.

 

그는 한국 성결교회가 전도관에서 교회로 전환해 본격적으로 한국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무렵 성결교회의 교역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일관된 복음주의자 성결 복음의 사역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사역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은 용기 있는 복음 선포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세속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거룩한 삶으로 요청하는 성결의 복음, 성서의 복음을 담대하게 외쳐야 할 것이다. / 발표: 박종현 박사(가톨릭관동대, 교양학부)

 

7. 박현명(1922-1025) / 해방 후 제1회 총회장 선임

 

박현명 목사는 해방 직후 4차례나 총회장으로 연임됐다(1946년 제1대, 1947년 제2대, 1948년 제3대, 1950년 제5대 총회장). 한국전쟁 발발 직전 2년 4개월 동안 미국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 협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50년 8월 10일 피난하지 않고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이북에 납치됐지만 좀 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한국 성결교회 운명 또한 긍정적인 면으로 달라졌으리라 예상해본다.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된 한국 성결교회를 되찾아 오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던 지도자였고, 한국 교회의 비참한 고난의 상황을 형제애로 나눌 수 있는 미국 교회를 방문해 한국 교회 현황을 잘 알리고 기도와 적절한 도움을 받고 귀국한 그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희생의 길, 북한으로의 납북이었다. \

박현명 목사는 고등 비평학의 성서이해를 완전 거부하고, 성령론적인 변형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성결운동의 방향에 선 교회 지도자로서 매우 선명한 리더십의 소유자였음을 명백히 했다.

 

성결운동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강조했던 박현명 목사의 견해를 바탕 삼아 현대 성결운동은 그 기조를 잘 견지하면서 성서, 교회 전통, 이성, 그리고 복음적 경험의 균형을 잡아 전인구원의 방향에 서야 할 것이며, 더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 발표:주승민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8. 이성봉(1925-1928) / 성결교 출신 부흥사

 

이성봉 목사는 그를 부흥사로 임명한 성결교회 뿐 아니라 다른 교단의 교회들에서도 부흥성회를 다수 인도하는 등 여러 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면서 한국 교회로부터 폭넓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는 성결교회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배우고, ‘성결’을 비롯한 ‘사중복음’에 관한 설교도 많이 했지만 그의 설교의 기초이며 핵심을 이루는 것은 ‘철저한 마음의 회개’였다고 볼 때, 그의 복음은 교파주의를 넘어 근대기독교의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잇는 것이었으며, 또한 종교개혁적인 사상에도 상당히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성봉 목사의 ‘명심도강화’는 ‘천로역정강화’와 ‘요나서강화’와 더불어 이 목사의 ‘3대 강화(講話)’에 속한다. 이 강화들은 이성봉 목사가 그의 부흥성화에서 즐겨 사용했던 내용이었으며, 각기 독립된 서적으로 출판됐다.

 

이성봉 목사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삽화를 사용한 기독교 영성서적 2가지인 ‘명심도’와 ‘천로역정’을 가져와 그의 부흥성화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해설을 추가해 ‘명심도강화’ 및 ‘천로역정강화’를 출판, 보급한 것이다.

 

이는 그가 교회사적 안목과 순수한 기독영성, 그리고 목회자적 열정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명심도강화’는 각 인물도판을 따라서 반복되는 요약, 해설, 찬양 등으로 이루어져 개인 또는 그룹의 경건훈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 발표:박형신 박사(남서울대, 교양학부)

 

9. 김유연(1930-1933) / ‘활천’ 주간과 기독공보 주필로 활동

 

김유연 목사는 만리현교회, 안성교회, 중앙교회, 신덕교회에서 목회했다. 1950년 8월 서울신학대학교를 지키다 납북된 5명의 교계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김유연 목사는 당시 성결교회 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진 탁월한 설교자, 저명한 문인, 훌륭한 목회자, 뛰어난 지도자였다.

 

1935년 성결교회 최초의 교육잡지로 창간된 ‘주교지남’의 편집부장으로 활약했고, 초교파적 부흥운동 잡지였던 ‘성화’에도 동참했다. 1922년 창간된 한국성결교회 기관지 ‘활천’, 1934년 창간된 성결교회 부인회 전국연합회 기관지인 ‘기쁜 소식’ 등에 수많은 설교, 한시, 단상 등을 발표하며 ‘기독교문학(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45년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모인 재흥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됐으며, 이 외에도 중앙위원, 총회본부 사무국 문교부 참사, ‘교회손해조사위원회’ 경기지구조사위원으로 선출돼 교단 재건을 위해 막중한 역할을 감당했다.

 

뿐만 아니라 경성신학교에서 신학과 성서학과 교수로 재직(신약, 설교학, 목회학 강의)했으며, 1946년 1월 17일에 창간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기관지 ‘기독공보’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합동찬송가 발행에 참여했으며, 기독교 방송국 준비모임에도 참여하는 등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목회자, 언론인, 신학교수, 교단 정치가로서 성결교회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 발표: 배덕만 박사(건신대, 교회사)

 

10. 정진경(1945-1948) / 한기총 대표회장 및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역임

 

2009년 소천한 정진경 목사는 학자로서, 목회자로서, 기독교복지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한국 교회 연합운동에 남긴 큰 족적이다. 그는 한국 교회 연합운동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100주년기념사업회 같은 초교파적인 단체를 세울 때도, 타인을 앞세워 그를 중심으로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지원했다.

 

그의 교회연합활동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 단계는 서울신대 교수로 재직 중에 참여해 활동한 시기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임원, 한국군기독교회 고문, 동북아신학교교육협의회 실행위원, 한국신학연구소 이사로 활동한 것은 재직 중 때의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학교를 사임하고 신촌성결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활동한 시기다. 지역사회와 기관과 연계해 어린이집을 운영하거나 지역 청소년을 돕는 일을 했다. 또한 한경직 목사가 보낸 외항선교회 최기만 선교사가 찾아간 것으로 계기로 정 목사는 외항선교회 사역에 참여했다.

 

세 번째 단계는 1981년 총회장으로 당선된 이후 본격적으로 성결교회를 대표해서 초교파적인 연합활동에 전념했던 시기다. 그의 연합운동은 1980년대부터 강하게 일어났던 복음주의 연합운동과 중복된다.

 

정 목사의 연합운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개방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정서를 갖고 있었다. 둘째, 폭넓은 인간관계다. 셋째, 복음주의 신학에 기초했다. 넷째, 시대적인 필요와 맞물려 있었다. 다섯째, 선교지향성을 지녔다. 여섯째, 교회갱신의 일환이었다. / 발표: 장금현 박사(세계사이버대 교목실장, 교회사)

 

11. 조종남(1952-1956) / 존 웨슬리 신학 성결교회와 한국교회에 소개

 

조종남 박사는 현재 생존해 있다. 그는 서울신대의 학장으로 사역하면서 오늘의 서울신대가 있게 한 장본인이다. 1968~1981년 제1차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서울신대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교육이념과 신조’를 제정했다. 그가 제시한 5개항의 ‘교육이념과 신조’는 서울신대가 복음주의 웨슬리안 신학교육의 산실이 되어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또한 교육의 질적 향상을 통해 새로운 대학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학칙과 행정규범의 개정을 통해 과감한 행정쇄신을 시도했다. 교가, 대학로고, 교과과정 등을 정리했다. 획기적인 조차에 대해 학교 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정오에는 교수기도회를 가졌고, 이후에 교수들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다.

 

1970년 ‘선교문제연구소’를 설치해 선교정책 수립과 연구기능 강화, 선교지도자 육성을 도모하도록 했고, 선교문서 출판을 목적으로 대학출판부를 설치했다.

 

조 박사가 학장이 된 후, 서울신대의 가장 큰 외형적인 변화는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경기도 부천시로의 학교 이전이었다. 신학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한 조 박사는 1980년대 사회적 민주화의 요구와 함께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6년 후 다시 학장으로 재임했던 시기(1988~1992년)는 서울신대가 현대화와 세계화로 발전하는 과정과 깊이 연결된다. 그가 다시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그해 총회에서 목사안수 자격이 대학원 졸업으로 상향조정됐으며, ‘교수논총’이 발간돼 교수들의 연구를 자극하고, 공동연구 업적을 성과물로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교수들이 새롭게 충원되면서 서울신대는 다른 주류 교단의 신학대학과 대등한 교수진을 갖추게 됐다. 신학대학 학부와 신학대학원/대학원의 강의시를 분리시켰으며, 이사, 전국 교회, 대학후원회의 지원으로 1989년 10월 새 건물의 대학원을 신축했으며, 1991년 교사, 강당(성봉기념관), 생활관(김종호기념관) 등을 준공해 대학원의 면학분위기를 좋게 했다.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성숙을 위해 교목실을 운영하면서 전도활동과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전도학’을 전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목실을 통한 학생들의 생활 지도는 때로 지나친 통제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학장의 내 편 만들기’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91년 서울신대는 ‘92학년도 대학입시문제지 도난사건’을 겪으면서 교단은 물론, 국민, 정부 당국에 커다란 물의를 빚었다. 결국 이 일로 1992년 1월 도의적 책임을 진 조 학장은 사임했다.

 

조 학장의 사임은 뜻밖의 사건으로 자신을 포함한 성결교회 전체에 아쉬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2010년 서울신대는 명예석좌교수로 임명했고, 2011년에는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2013년 명예총장으로 추대했다. / 발표: 박창훈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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