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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본문

교회와 사회

교회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8:28

기윤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성서적 실천’ 포럼 개최 / 2015년 12월 1일 기사

 

우리 사회는 현재 정치, 경제, 교육, 주거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라는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11월 27일(금)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성서적 실천’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구약에서 살펴본 공평과 정의의 개념(김근주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약의 평화 개념과 성서적 실천(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기독교윤리적 모색(고재길 교수, 장신대) 등의 발표가 있었다. 기윤실은 발표자료를 홈페이지(자료보기)에 올려놨다.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 주>

 

 

 

# 구약에서 살펴 본 공평과 정의 / 김근주

공평과 정의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미슈파트”와 “쩨다카”이다. 대부분의 구절들에서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순서로 나오고, 창 18:19, 신 33:21, 시 33:5; 37:6; 72:2; 89:14; 103:6, 잠 1:3; 2:9; 8:20; 16:8; 21:3, 사 58:2, 렘 22:13, 호 2:19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쩨다카”는 인간의 절대적인 윤리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관계가 하나님, 그리고 이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연관된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대해 “쩨다카/체데크”를 행한다는 것은 그가 이웃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시 15:2). 그래서 그는 이웃을 참소치 않으며, 행악지 않고, 훼방치 않는다(시 15:3-5).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사 58:8-9; 겔 18:5-9). 에스겔 18:5-9에서 “법과 의”로 번역된 용어는 “미슈파트”와 “쩨다카”며 이를 행하는 자는 “의인”(짯디크)이다. 결국 “쩨다카”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곧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상거래의 기본은 “쩨다카의 저울”이다(레 19:36; 신 25:15; 겔 45:10). 그런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로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쩨다카”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의하는 것과 연관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의로움이다. 그리고 인간의 처지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잡으시고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며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쩨다카”는 하나님의 구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사 56:1; 62:1).

이웃에 대해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함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긍휼이 우선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정의 개념에서 구약의 “쩨다카”는 긍휼이 포함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공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 단어는 ‘법, 재판, 규례 혹은 심판’까지 넓은 의미 영역을 지니게 된다.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다루어지는 구약에서의 주된 현장은 다름 아닌 “성문”이다. 성문은 이스라엘의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로서, 누군가의 덕행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잠 31:23),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며(왕하 7:1), 때로 우물이 존재하기도 했다(삼하 23:15). 그러나 성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판’이었다.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회 전체에 죄가 만연케 된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성읍의 장로들이 앉은 곳에서 호소한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증언해준다. 이렇게 행하는 것을 가리켜 쩨다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읍의 장로들은 이 호소를 듣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되, 이 가난한 사람을 억울케 한 사람들의 외모나 그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뇌물에 현혹되지 않은 채 곧게 판결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야말로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가난한 자의 억울함이 풀려질 때, 그 사회는 “미슈파트”가 살아있는 사회,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실행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모와 뇌물은 이 판결을 굽게 하는 최대의 방해요소이다.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지 않는 재판은 공의로운 재판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상에서 언급되는 공평과 정의가 단지 인간적인 덕목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 성경은 공평과 정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두 기둥임을 말하고 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시 89:14)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들렸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시 33:5)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되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신다(시 99:4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도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 나라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공평과 정의의 나라이며, 공평과 정의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이 곧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와 함께 쓰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이러한 특징을 아는 것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헤세드”)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니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다윗의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까닭이다. 세상에서 제일 센 나라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를 이루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앗수르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아하스가 나라의 위기를 겪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앗수르의 제단을 본 뜬 제단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 그 돌파구를 모색하였듯이(왕상 16:10-16), 우리도 교회 안에 온통 앗수르의 방식, 세상 방식을 끌어들여서 세상을 본떠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까닭은 그 나라 안에서 모든 백성들이 각자의 기업을 누리고 살면서 공평과 정의가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구약에서 종종 반복되는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거하는 삶’도 이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왕상 4:25; 미 4:4; 슥 3:10).

각자 자신의 기업에서 자신의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중심주의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그 자손과 더불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레위기의 절기 본문들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의 의미와도 통한다(레 23:3,14,21,31).

그리고 희년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들의 거주지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그 거주하는 기업을 회복시켜 그 땅에 거하게 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의 표지는 크기나 넓이에 달려 있지 않되,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원칙,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는 삶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은 이 세상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Imitation of God)”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명령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사회 양극화와 평화에 대한 신약성서적 통찰 / 차정식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세상 전복을 위한 아편이나 주술처럼 내세워 실제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고 부자를 가난한 자로 내치는 정치혁명을 선동한 것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복과 부자의 화를 선포하면서도 평탄케 하는 방법으로 평화를 선호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의 중요성을 십자가의 상징으로 설파했다. 이 세상의 위계질서를 재탕하는 단순한 보응의 논리를 그는 도리어 꾸짖었다(막 10:35-45). 이는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체계로 보지 않고 끊임없는 전복이 가능한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소통의 질서로 투시한 증거로 판단된다.

예컨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막 10:31)는 전복적 예언은 사회의 고착된 구조를 용인하지 않고 일등과 꼴찌가 따로 없는 원만한 샬롬의 질서, 즉 삶의 질에 관한 한 양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양극화가 이루어지지지 않는 공동체의 미래를 전망한 것이다.

사회 양극화는 한 체제의 극심한 분열과 공동체 소멸의 증거이다. 어느 시대에도 사회구성분자에 따라 극성은 존재했지만 그 극성의 충돌과 파열이 극단을 치닫게 되면 그 체제는 결국 해체되었다. 그 양극화를 넘어서는 대안은 공평과 정의의 실천에 터한 평화밖에 없다. 그것은 한 사회가 공동체의 통합성과 전일성을 회복할 때 가능해진다.

보편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으로서 평화 사상은 구약성서의 ‘샬롬’에서 발원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전통에서 이 개념은 물질적 복락, 몸의 건강과 심리적 안정, 이와 연계된 만족스런 삶, 그리고 민족적 번영과 제반 관계의 안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세속적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이 어휘는 특히 사람들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가령, 양자 사이 정치적 연맹이 언약을 매개로 하여 샬롬의 관계를 이루는 경우, 이때 샬롬은 물질적 복락의 상태를 의미하기보다 언약을 통해 온전해진 평화의 관계를 지칭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서 샬롬은 그의 회복된 백성들과 그들이 건설한 신앙 공동체를 향한 포괄적 구원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개인의 내면적 평안과 같은 영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경우가 보이지 않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구약성서의 샬롬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평화, 내면적 평안보다는 외부적 복락을 중시하는 사회적 개념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개인들의 관계를 샬롬의 개념 속에 포함시켜 언급한 것은 후대 랍비문헌에서이다. 랍비들 역시 샬롬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한 선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평화가 단지 민족들 사이의 정치 외교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다툼을 제거한 상태로 이해되었다. 나아가 이렇게 확대된 관계적 개념으로서 샬롬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실한 관계까지도 포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의 평화사상은 이러한 개념적 진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리 그 사상적 지형을 일별해보건대, 신약성서의 평화 이해는 앞서 요약한 희랍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포용하면서 융합시키고, 나아가 그 의미의 외연을 확대하고 심화함으로써 평화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양극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고”(2:44~45),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4:34~35) 주었기 때문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양극화 문제의 해법으로 가장 이상적일 듯싶은 사도행전의 공동체 모델은 잠시 화려하게 지탱되다가 내외적인 압력으로 인해 체제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리더십으로 활약한 베드로와 요한이 곧 그 교회를 떠나 이방의 땅으로 유랑 전도의 돛을 올렸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후 ‘가난한 성도들’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종말론적 열망은 충만했지만 장기적인 역사의 안목을 지니지 못한 공동 소유와 공동 분배란 이상적 신념이 인간의 복잡한 중층의 욕망과 사회 현실에 부대껴 좌초한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양극화의 해법이 지속 가능한 체계의 개발로 나타나야 하는 지난한 과제임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전개 국면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가 이방인 교회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상부상조하는 호혜적 코이노니아의 관계를 창출함으로써 양극화 해법의 중요한 암시를 던진다.

예루살렘 공의회로 알려진 이 회합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과 그 곳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부탁받고 흔쾌히 응낙한 바 있다(갈 2:10). 이후로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에서 바울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 일만은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예컨대,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헌금을 내고 이를 수합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알려주고(고전 16:1-4), 나아가 이를 독려하기 위해 별도의 행정서신을 써서 발송한다(고후 8-9장).

나아가 그는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호 나눔을 통한 ‘균등’의 원리를 강조하여 그 모금 캠페인의 본질적인 의미를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역설했다.

이방인 교회의 넉넉한 것이 물질적인 여유를 가리킨다면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의 넉넉한 것은 신앙적 영적인 유산일 터. 상대방의 넉넉한 것이 자신의 부족한 것이 된다는 이 인식은 추후 좀 더 구체화되어 로마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빚진 자’ 의식으로 발전한다. “저희는[=이방인 교회는] 그들에게[=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이처럼 상호간의 결핍을 충족시켜 주는 호혜적 나눔의 관계는 아무리 풍족한 자들도 결핍이 있으며 아무리 부족한 자들도 나눠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특정한 것의 결핍으로 밑바닥이 되고 특정한 것의 풍요함으로써 꼭대기가 되는 식의 양극화를 지양하고 서로에게 상대방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빚진 자로서의 신앙고백을 나눌 때, 우리는 풍성한 나눔으로 자만할 수 없고 또 그러한 나눔의 수혜로 비굴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초기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 사이에 진행된모금 캠페인은 그 귀결이 성공적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한 자들의 존재가 그들보다 덜 가난하거나 상대적으로 부요한 자들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한없는 후원의 의무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들이 서로 남이 아니라 종말론적 연합의 꿈을 이루어 낼 한 몸의 다른 지체로서 동고동락해야 할 형제요 자매라는 점에서, 오늘날 양극화의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방치하는 우리들에게도 심각한 도전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울에 의해 주도된 초대교회의 모금 캠페인이 나눔과 균등의 원리에 기초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대 의식을 표출한 사건이었다면, 야고보서에 반영된 상황은 특정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이에 따른 양극화 현상을 문제 삼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야고보서의 이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약 1:9-10)는, 뜨거운 종말의식과 연계된 전복적 구도에 비추어 예수의 그것에 잇닿아 있는 듯하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간 자들로 묘사된다(약 2:6). 부자는 또한 재물을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넘어 말세에 과시용으로 재물을 축적하였다. 그 축재를 위해 그들은 품꾼의 삯을 수탈하는 등의 불의한 짓을 자행했다.

또한 사치와 방종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고, 그 와중에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했다(약 5:1-6). 이제 심판의 날 그들에게 돌아갈 것은 고생과 통곡일 뿐이다(약 5:1).특히 회당에서 벌어진 빈부 차별과 이로 인한 양극화의 단면은 기독교의 경건을 뿌리째 훼손하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야고보서의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행태는 신앙적 경건의 망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약 1:27).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앙적 경건의 관심 사항은 단지 주일성수와 십일조, 기도와 금식, 헌신과 봉사의 열심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열심이 궁극적으로 야고보서 식의 경건에 잇닿아 있는가, 즉 가난한 자에 대한 빚진 자로서의 배려와 차별 철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존중, 그리고 세속적 가치 규준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의 항체가 있는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야고보서의 신학적 교훈을 수용한다면 오늘날 한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양극화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삼박자의 유착으로 횡행하는 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고 그 대안적 가치관을 이른바 ‘경건’의 이름으로 계발해서 그것을 제도적으로 공동
체의 삶에 착근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교에 나선 그의 백성들은 이러한 양극화의 세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전망대로 양극의 전복을 목표로 우리 사회와 교회의 극성(極性)을 완화하는 사명을 진작하여야 한다. 교회가 앞장서서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나눔을 통한 균등의 체제를 이루는 일에 발끈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첫째, 평화가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이념의 수단으로 휘둘려져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평화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서 삶의 일상성 속에 실제로 안착하여 ‘샬롬의 인사’처럼 매일의 경험 속에 추구해야 할 미덕이며 누려야 할 가치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21세기의 평화신학은 평화가 호혜적이고 관계적 개념임을 명심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상호간의 개방적 소통을 통해 서로의 타자성을 존중하고 용납함으로써 새롭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21세의 평화신학은 개체 생명이든, 유기적 조직체이든, 훼손된 그 생명을 회복시키고 분열되고 불화하는 제반 관계를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예수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연거푸 복창하며 부르대는 것과 다르다. 예수의 꿈을 우리의 삶 속에 구현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결단이 빠진 예수 신앙, 그리스도교인의 자부심은 자폐적이고 불온하다. 나는 일용할 양식 이상의 물질적 탐욕에 빠진 나를 비롯한 이 땅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양극화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족쇄에서 벗어나 샬롬의 공동체를 이루길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궁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등과 꼴찌의 전복적 질서를 내다본 예수의 종말론적 희망을 회복하는 것이 화급하다고 본다. 바울이 제시한 호혜적 코이노니아와 균등의 원리, 야고보서가 역설한 사회적 영성과 실천적 경건의 원칙은 이제 우리 사회의 상생을 위한 필수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기독교 윤리적 모색 / 고재길

정의를 사회의 근본규범으로 이해하는 롤즈의 정의론은 정의의 주제와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서 다룬다. 롤즈는 불평등한 상황 속에서 상대적인 평등의 실현을 위해 차등의 원칙을 강조한다.

차등의 원칙은 가장 불리한 형편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회의 최소수혜자들을 변호하는 롤즈의 정의론은 불공정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큰 의미가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요약되는 그의 정의론은 “원초적 입장”, “무지의 베일”, “상호무관심한 합리적 인간”을 전제한다.

절차적 과정에서 공정성을 확보하는 그의 정의론은 절차적 공정성에 기초한 정의의 두 원칙을 통해 확증된다. 차등의 원칙에 대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롤즈는 자유주의적 전통에 견고하게 서 있다.

롤즈의 정의관은 한국에서 회자된 공정사회와 경제민주화의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공정사회는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승복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불리한 형편에 처한 최소수혜자들의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경제민주화의 개념은 내용적으로는 롤즈의 차등의 원칙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에 대한 현 정부의 실천의지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경제적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큰 격차, 정치와 공직사회의 불공정한 관행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의 공정지수를 높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이 과제를 분배정의의 문제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정부의 정책은 첫째, 일자리, 소득,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균등한 교육기회의 제공, 일자리의 창출, 유연안정성의 실현에 주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둘째, 의무교육을 고등학교까지 확대하고 대학생을 위한 학자금융자제도의 보완과 확대가 필요하다.

셋째, 정부의 정책은 “고가의 주택에 부과되는 종합부동산세”와 “금융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정책들이 실질적인 열매를 맺으려면 “함께 잘 사는 것이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며 “정책들을 실제로 시행할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와 실천”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공정사회”보다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롤즈의 정의론은 더 엄격한 수준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롤즈의 정의론의 한계를 비평하는 신학, 특히 기독교윤리학의 과제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의무론적 윤리의 경직성, 평등에 대한 자유의 지나친 우선성, 낙관주의적 인간론, 도덕적 개인주의 등과 같은 문제들을 갖고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은 기독교정의론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독교정의론의 기초는 현실적합성의 윤리와 자유와 평등의 상호관계성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또한 기독교정의론은 기독교인간론에 근거하여 공동체적 자아의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기독교정의론의 기초를 견고하게 세운다면 한국사회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실현은 믿음과 결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제도적 차원의 노력과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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